왜 인간은 대체될 수 없는가: 폴라니의 역설과 오링 이론
그렇다면 계산과 암기에서 해방된 우리가 지켜야 할 전문성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1. 폴라니의 역설 (Polanyi’s Paradox):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
마이클 폴라니가 주장했듯, 인간의 지식에는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암묵지(Tacit Knowledge)'가 존재합니다.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모든 사람이 자전거 타는 법을 물리학 공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처럼, 전문가의 직관은 데이터화 되지 않습니다. 해리 콜린스는 이를 '기여적 전문성(Contributory Expertise)'이라 불렀습니다.
AI는 이미지와 텍스트를 통해 '지식적 전문성(Interactional Expertise)'은 완벽하게 학습하지만, 몸으로 부딪혀 체득한 현장의 맥락은 모릅니다. AI는 "혈압 140/90mmHg"이라는 텍스트는 읽지만, 진료실에 들어오는 노동자의 미세한 떨림, 작업장의 묘한 냄새, 노사 간에 흐르는 긴장감 같은 맥락은 읽지 못합니다. 이것이 AI의 한계이자 우리의 기회입니다.
2. 오링 이론 (O-Ring Theory): "99%가 완벽할수록 마지막 1%가 폭등한다"
1986년 챌린저호 폭발 사고는 거창한 엔진 결함이 아니라, 작은 고무링(O-ring) 하나의 결함 때문이었습니다. 경제학자 마이클 크레머는 이를 인용해 "모든 공정이 자동화되어 완벽해질수록, 자동화되지 않은 마지막 단계(Last Mile)의 가치는 기하급수적으로 폭등한다"는 오링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AI가 1만 명의 검진 데이터를 완벽하게 분석한다 해도, 단 한 명의 중대재해 징후를 놓치면 회사는 위기에 처해집니다. AI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감옥에 가지도 않습니다. 결국 "이 사람에게 작업을 시켜도 된다"고 사인하고, 그 결과에 대해 법적·윤리적 책임을 지는 것은 인간 전문가의 몫입니다. AI가 똑똑해질수록, 그 AI의 오류를 최종적으로 검증하고 결단 내리는 데에 따르는 값은 더 비싸질 것입니다.
앵무새를 죽여라: 보건관리 전문가의 역할 대전환
이제 선택은 명확해졌습니다. 기계적인 '앵무새 업무'에 매몰될 것인가, 아니면 AI를 도구 삼아 전문가로서의 밀도를 높일 것인가. 각 직역별로 우리의 업무가 어떻게 재정의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보건관리자: "혈압/혈당 측정기"에서 "건강 리스크 전략가"로
지금까지 보건관리자의 업무는 종종 단순한 정보 전달자, 혹은 반복적인 수치 관리자의 역할로 제한되곤 했습니다. 건강검진 수검률을 챙기고, "혈압이 높으니 병원 가세요"라는 안내 문자를 보내는 행정 업무에 치여 정작 중요한 일은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런 단순 통보와 데이터 정리는 AI가 시간 당 수 천 건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수치 관리는 AI에게 맡기십시오. 대신 보건관리자는 확보된 데이터를 통해 조직 전체의 건강 상태를 진단하고 관리하는, 본연의 역할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 데이터 설계자: AI는 주어진 데이터만 분석합니다. 하지만 전문가는 “우리 사업장에 진짜 필요한 데이터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혈압 수치만 모을 게 아니라, '부서별 초과근무 시간'과 '건강이상 호소율'을 매칭해서 분석해보자"고 결정하는 것은 당신의 몫입니다.
- 건강 경영 컨설팅: AI가 "A부서의 유소견자가 증가했습니다"라고 경고할 때, 당신은 경영진에게 솔루션을 제시해야 합니다. "A부서의 건강 악화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최근 변경된 교대 근무 시스템 때문입니다. 이를 방치하면 산재 비용이 30% 증가하니, 근무표를 이렇게 조정해야 합니다."라고 설득하는 '전략적 판단'이 보건관리자의 업(業)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개별 판정의 늪"에서 "집단 리스크 분석가"로
전문의들이 겪는 가장 큰 고충은 나무만 보느라 숲을 보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입니다. 개별 근로자의 수치와 씨름하다 보면, 정작 공정 전체에 퍼져 있는 위험의 흐름은 놓치기 쉽고 현장 방문은 언감생심입니다. AI는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역학적(Epidemiological) 관점을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개별 케이스의 씨름은 AI에게 맡기고, 전문의는 현장과 데이터를 연결하고 해석하는 분석가가 되어야 합니다.
- 집단 트렌드 감시: 개인의 간수치가 정상 범위(40 이하)라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AI를 통해 부서별 데이터를 묶어보십시오. "A공정 근로자들의 평균 간수치가 10 U/L 증가했으며, 기준치를 초과한 사람은 15% 늘었습니다."라는 결과가 나온다면, 이것은 개인의 음주 문제가 아니라 환기 설비나 유해 물질 노출의 문제입니다. 개별 판정으로는 보이지 않던 공정의 위험을 찾아낼 때, 비로소 우리는 근로자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우리 일의 본질에 한 발 더 가까워집니다.
- 환경과 건강의 교차 검증: 특수건강진단(사람)과 작업환경측정(환경) 데이터는 따로 놀기 쉽습니다. 측정 결과는 '노출 기준 미만'인데, 검진 결과에서 생물학적 노출 지표(대사산물)가 높게 나온다면? AI가 찾아낸 이 데이터의 불일치가 바로 전문가가 개입할 지점입니다. 불일치된 데이터를 "피부 흡수가 일어나고 있거나, 측정되지 않은 사각지대가 있다"는 해석으로 풀어내는 것이, 단순한 측정 결과표보다 훨씬 강력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 사각지대의 복원: 매일 현장이 바뀌는 건설 일용직은 직업보건의 가장 큰 사각지대입니다. 여기서 전문가는 AI를 이용해 파편화된 근무이력을 복원해야 합니다. 근로자의 전자카드 기록에 이미 공개된 '직무-노출 매트릭스(K-JEM)'를 대입하여, 지난 10년간의 누적 노출량을 객관적 수치로 산출해 내십시오. 개별 판정을 위한 시간을 아껴 파편화된 정보를 통합하여 특수건강진단의 실효성을 높이는 일, 이것은 AI 시대를 통과하는 대체 불가능한 전문성의 사례로 남을 것입니다.
[data] Korean Construction Job-Exposure Matrix(KoConJem) based on Experts' Judegement
결론: 현장으로 돌아가자
회계사는 엑셀 덕분에 장부에서 고개를 들어 기업의 미래를 보게 되었습니다. AI는 우리를 단순하게 반복되는 지식 노동에서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해방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모니터 뒤가 아니라, 사람이 있는 노동현장입니다. AI가 "데이터 상 위험 징후가 포착된다"라고 신호를 보낼 때, 우리는 그 신호를 들고 현장으로 달려가 노동자의 상황을 살피고, 경영진을 설득해내는 '오링(최후의 보루)'이 되어야 합니다. 기술적인 테크닉은 AI에게 줘버리십시오. 대신 우리는 오감을 가진 인간의 몸과 책임, 그리고 현장성이라는 무기를 통해,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로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오링'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AI라는 명검이 분석할 '데이터'가 제대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특수건강진단과 작업환경측정 데이터는 과연 안녕할까요? 노동부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블랙홀처럼 사라지는, 우리 산업보건 데이터의 관리 현실과 대안을 다음 화에서 다루어보겠습니다.
[시리즈 기사 보기] 1화. AI의 진화와 의학의 변곡점: LLM이 열어갈 새로운 지평 2화. HealthBench로 본 의료 AI 성능, 과연 믿을 만할까? 3화. 특수건강진단 판정을 AI가 대신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