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 소개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M.W. Turner, 1775~1851)는 영국의 풍경화 거장이자 빛의 마술사로 불립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는 19세기 영국 해군의 전설적 군함 '테메레르 (HMS Temeraire)'가 퇴역하며 템스강을 따라 마지막 정박지로 예인되어 가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 배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후 수십 년간 왕립 해군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산업화의 새로운 상징인 증기선에 끌려 퇴역하는 운명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범선은 웅장하고 순백색으로 빛나는 반면, 예인하는 증기선은 검고 연기를 뿜으며 산업사회의 시작을 알립니다. 이는 한 시대의 끝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한 화면에 담아낸 것입니다.
이 작품은 1851년 터너 유증의 일부로 국가에 기증한 것으로, 2005년 BBC 설문조사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국 그림'으로 선정되었고, 2020년대 이후 20파운드 지폐에도 화가의 자화상과 함께 인쇄되었습니다.
2. 시대 변화의 두 얼굴: 변화 vs 상실
작품은 상징으로 가득합니다. 앞에서 끌고 가는 검은 예인선은 산업혁명 시대를 상징하는 기계화의 아이콘입니다. 그 뒤를 따르는 순백의 전함 테메레르는, 영광의 시절을 상징하는 손기술 기반의 구시대 노동을 나타냅니다. 해가 지는 방향은 실제 테메레르가 향한 서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터너는 일부러 석양을 배경으로 배치했습니다. 즉, 이 그림은 단순한 기록화가 아니라 알레고리(상징적 묘사)인 것입니다. 해가 지는 것은 한 시대의 종말을 상징합니다.
터너는 이 그림에서 단순히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향수만을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미술사학자 맷 윌슨(Matt Wilson)에 따르면, 오히려 터너는 현대성을 찬양하고 인간 창의성의 모든 발현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비, 증기, 속도(Rain, Steam and Speed)〉를 보면, 그는 신기술의 박진감과 감각적 충격을 회화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기차를 탄 인상을 바탕으로, 비와 증기, 속도의 조합을 격렬한 붓질로 재현하며 새로운 시각 경험을 창출했습니다. 즉, 그는 기술의 발전을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빛, 속도, 대기 등 이전 회화에서는 담아내지 못했던 주제를 감각적으로 실험하면서 시대의 전환을 기록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함 테메레르〉에서는 유독 아련한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그림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일 것입니다. 전함의 퇴역은 한 시절의 끝이자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이기도 하며, 이는 곧 인간 노동과 기술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군함을 견인하는 검은 증기선은 단지 기술적 진보의 상징만은 아닙니다. 그 검은 연기와 땅에 가까운 위치는, 물질성과 노동의 현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석탄을 나르고, 기계를 돌리고, 방적기를 관리하며 새 시대를 떠받쳐야 했던 그 배경에는 과로와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3. 직업건강의 관점에서 본 '변화'
터너가 그린 변화의 풍경은 지금도 산업현장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자동화, AI, 플랫폼 노동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변화는 많은 근로자들에게 불안정성과 적응의 스트레스를 유발합니다. 이에 대해 직업의학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 변화에 가장 취약한 직업군은 누구인가?
- 변화에 따른 건강 영향은 어떻게 측정되는가?
- 예방은 가능한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가 터너의 그림에서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바로 “무너지는 영광 뒤에 남겨진 이들”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선두에 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로 인해 뒤처지고 소외되는 이들을 보듬는 것이야말로 직업환경의학이 추구해야 할 방향일지도 모릅니다.
4. 화가 소개: 윌리엄 터너의 삶과 시선
터너는 1775년 런던 코벤트가든에서 이발사 아버지와 정신질환을 앓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소년 시절부터 재능을 보이며 거리에서 스케치를 팔았고, 14세에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이후 60여 년간 수많은 유화, 수채화, 드로잉을 남기며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풍경화에 과감한 빛과 대기의 표현을 도입하며 인상주의의 선구자 역할을 했고, 후기 작품들은 추상 표현주의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의 회화적 탐구는 과학적 호기심과도 맞물려 있으며, 특히 '빛'에 대한 집착은 그의 대표작들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납니다. 일부에서는 터너의 이국적인 빛과 색상 사용이 이색시(dichromatic vision) 또는 백내장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고 언급합니다.
터너는 극도로 사적이고, 괴짜스럽고, 은둔적이었던 인물로, 사회적 예의가 거의 없었지만, '놀라운 범위의 사고방식'을 가진 '가장 위대하고 심오한' 화가로 여겨졌습니다. 말년에 그는 점점 더 괴짜로 변했고 세상과 단절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2015년 개봉한 <미스터 터너>라는 영화는 그의 마지막 25년간의 생애를 다루는 데, 그의 독특한 성격과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망 시 개인 소장품 전부를 국가에 기증했고, 세인트 폴 대성당에 묻혔습니다. 터너의 생애는 오늘날 직업건강의 관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급변하는 산업사회 속에서 변화를 관찰하고 표현했지만,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를 직접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변화의 ‘풍경’을 시적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는 시대의 불안을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화폭으로 치환해낸 예술가였습니다.
참고문헌
- National Gallery, London. The Fighting Temeraire.
- BBC Culture. The Fighting Temeraire: Britain’s best-loved painting.
- Rodner WS. J.M.W. Turner: Romantic Painter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7.
- Mike McKiernan, JMW Turner, Keelmen Heaving in Coals by Moonlight 1835, Occupational Medicine, 2016;66:266–26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