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안녕하세요.
우리는 직장에서 누구나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이들은 존재 자체를 감춰야 하기도 하죠.
특히 성소수자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아직도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성소수자 노동자’의 일하는 삶을 조명한 의미 있는 연구 결과를 전해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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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정지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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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
트랜스남성 C가 구직 사이트를 스크롤 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병역 사항 기재’ 칸입니다. 그 한 줄이 ‘지원 가능’과 ‘포기’를 가릅니다. C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선택지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돈은 벌어야 하는데, 마음 놓을 만한 회사를 기다릴 순 없죠.” 새 직장을 준비하는 지금도 그는 ‘군 복무를 물으면 커밍아웃할까, 또 다른 거짓말을 준비할까’ 하는 리허설을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합니다.
누군가는 단 한 번도 의식해 본 적 없는 ‘병역’ 체크박스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긴장 버튼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존재를 지키기 위해 겹겹의 거짓말을 두르고 면접장에 들어가야 하는 이 현실은, 차별이 구조화된 일터가 성소수자뿐 아니라 모든 약자를 어떻게 소진시키는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는 전체 인구의 약 4.5~7%로 추정되지만, 그 존재는 일터에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성소수자 당사자들은 차별을 경험해도 드러내지 않거나, ‘아웃팅’(본인의 동의 없이 정체성이 알려지는 일)을 우려해 그냥 참는 경우가 많습니다 . 이 연구는 성소수자 노동자의 노동환경과 정신건강 실태를 구조화된 설문조사와 심층 면접조사를 통해 분석하고자 했습니다. 이번 조사에서는 성소수자 노동자 72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을 진행했고 총 19명을 만나 면접조사를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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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에서 드러난 노동 환경, 정신건강의 위기
연구에 참여한 성소수자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 평균보다 더 높은 학력, 더 많은 전문직 종사 비율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심각한 정신건강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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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용근로자 83%, 임시.기간제근로자 13.1%, 일용근로자 3.8%
- 관리자 및 전문직 (19.7%), 사무직(54.2%), 서비스직(20%), 생산직 (6.1%)
- 학력은 대졸 이상이 70.6%, 월 소득은 200~400만원 구간이 68.4%
- 우울 증상 경험률: 24.6% (일반 노동자 대비 4.3배)
- 자살 생각: 17.9%, 자살 시도: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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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구집단 노동자에 비해 언어 폭력, 모욕적 행위 등 폭력에 보다 빈번히 노출되었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특히 원하지 않는 성적 관심에는 무려 23배, 지난 1년 간의 성희롱은 28배, 왕따/괴롭힘은 72배 높게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비교가 된 근로환경조사가 1:1 면접조사로 진행되어 해당 문항에 “그렇다”고 응답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으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성소수자 노동자는 직장내 폭력에 높은 비율로 노출되고 있는 상황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폭력 노출 경험은 정신건강 악화로 곧장 연결됩니다. 직장 내 폭력이나 혐오 발언을 경험했을 때, 우울 증상이 2~4배 높아지는 경향이 뚜렷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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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회사엔 그런 사람(성소수자) 없잖아?’ 라는 상사에게 ‘너무 비약적인 것 같다’고 반박했더니 한 달 내내 업무 트집이 시작됐어요.” - 참가자 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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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부당경험이 있었던 경우, 그 영향으로는 “근로의욕 저하 등 업무집중도 감소(66.0%)”가 가장 많았고 직장을 떠나고 싶다고 느끼거나(58.1%), 우울증, 불면증 등 정신건강이 악화(48.1%)되었다는 응답이 뒤따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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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로 증언한 일터의 어려움들
나아가 이 연구는 혐오의 구조적 성격을 지적합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여성, 장애인, 고령자,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적대가 조직 내에서 ‘정상성’처럼 용인될 때, 누구든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혐오를 방치하는 조직은 더 많은 노동자의 심리적 안전을 위협하게 됩니다. 면접조사에 참여한 성소수자 노동자들은 가능한 한 성소수자 정체성으로 차별받지 않는 직장을 찾거나 직종, 고용형태를 스스로 제한하는 전략을 사용했음을 증언합니다.
연구참여자들은 성소수자 혐오발언이 ‘성소수자 혐오’에만 한정된 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여성, 노인, 빈곤층, 장애인 등 약자에 대한 혐오를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분위기에서는 당연히 성소수자 혐오도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조직 내 전반적인 인권감수성이 부재할 때 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들은 소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터에서 ‘보이지 않도록 존재하는’ 방식으로 차별을 피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숨겨야 하는 과정과 이성애 중심의 대화에서 반복적으로 배제되며, 일상이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되는 양면을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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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회사는 가족 친화 경영이라는 걸 해요. 가족과 함께 하는 활동을 잘 지원해주는데, 그런 것들이 (우리나라에서 기혼자가 될 수 없는) 저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제도인거죠. 그러니까 이 회사가 아무리 좋은 복지 제도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한테는 반쪽 뿐인 제도라는 점이 슬퍼요.” - 참여자 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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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우리는 한 가지 핵심 질문에 도달하게 됩니다. 정체성 자체가 원인일까, 아니면 그 정체성을 둘러싼 환경이 문제일까? 이 연구는 후자에 주목하며, ‘사회적 안전감’이라는 이론적 틀을 제시합니다. “사회적 안전감”은 미국의 심리학자 L.M.Diamond에 의해 제시되었습니다. 사회적 안전이란 신뢰할 수 있는 사회적인 유대, 소속감, 포용된다는 느낌, 사회적인 보호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숨기지만, 경계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은 만성적인 불안과 우울을 유발하게 됩니다. L.M.Diamond는 소수자 집단이 이러한 사회적 안전감이 부족하거나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만성적인 우울과 불안의 주된 원인이고 사회적으로 안전하다는 인식을 받게 되면 경계를 늦추고 정신건강이 개선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성소수자의 정신건강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차별, 성소수자에 대한 괴롭힘/폭력을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안전감을 주는 것도 중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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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에게 안전한 일터를 바라며
이 연구는 차별과 혐오가 어떤 이들에게는 불건강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 하는 사람들은 이들의 인권을 마치 ‘토론 가능한 쟁점’으로 다루고는 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를 둘러싼 직업적 유해요인을 탐구하고 예방하고자하는 전문가 집단으로서, 우리는 어떤 정체성을 가진 노동자도 건강을 해치는 환경에 노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는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성소수자에 대한 배제가 건강과 일터의 심리적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공식 발표한 바 있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 또한 모든 노동자가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조직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다고 강조합니다. 국제적 및 국내적 기준은 모두 정신건강과 사회적 안전감을 ‘작업환경의 일부’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연구는 단순히 성소수자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성소수자에게 안전한 직장’은 곧 ‘모두에게 안전한 직장’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의 존중과 포용은 어느 소수자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혹은 이성애 중심의 조직문화 속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스트레스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를 넘어 조직 전체의 안전과 생산성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정치적 호오나 사회문화적 입장보다 먼저, 일터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는 전문가로서의 시선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선은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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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을 넘어 건강하게 일하기 위해 - 무엇이 달라져야 할까?
연구자들은 성소수자 노동자가 보다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개선점들을 제시했습니다.
첫째, 직장문화의 개선이 필요함을 지적합니다. 직장문화는 성소수자 차별과 긴밀하게 얽히며, 위계적이고 성차별적인 문화에서는 성소수자는 더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높일 수 있는 실효적인 교육을 마련해야 하고,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을 통해 차별을 허용하지 않는 일터라는 점을 명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국내외 주요 기업들은 조직 차원의 포용성을 높이기 위한 실천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IBM은 미국 Fortune 500 기업 중 최초로 동성 파트너에게 동일한 복리후생을 제공했고, HSBC UK 는 성별 구분 없는 복장 지침과 무지개 ATM 캠페인을 통해 젠더 다양성을 가시화했습니다. Citi 은행은 전 세계 지사에서 임직원이 자신의 성별 정체성과 대명사를 스스로 선택해 등록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마련했습니다.
국내에서도 신한금융, KB국민은행 등은 사내 다양성 헌장에 ‘성적지향/성별정체성 차별 금지’를 명문화하며 변화를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실천은 단지 인권의 관점에서 뿐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과 정신적 소진을 예방하는 산업안전보건법의 ‘정신적 유해요인’ 관리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는 “정신적 건강장해를 유발할 수 있는 업무 스트레스를 포함한 유해요인을 예방/관리”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직장 내 차별과 혐오도 업무상 정신적 유해요인으로 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둘째, 노동조합의 역할을 확대할 것을 요청합니다. 보다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활동이 노조 활동의 하나이므로, 일터가 성소수자에게도 보다 안전하고 평등한 공간이 되도록 목소리를 내는 것 역시 노동조합의 역할입니다. 노동조합이 성소수자 노동자의 노동권 개선을 위한 경로로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현재 일터에서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비정규직 등 다양한 정체성과 조건이 중첩된 상태에서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전망은 여전히 미비한 실정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연구에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하나의 제도적 대응책으로 제안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법안을 둘러싸고 종교적 신념, 표현의 자유 등 헌법적 권리와 충돌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며, 사회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환경의학 전문가로서 우리는 이 논의가 ‘정치적 찬반을 가리는 일’이 아니라, 누구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고민하는 과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법률의 형태가 어떠하든, 차별을 줄이고 안전한 근무환경을 만드는 것이 전문가로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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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해볼 수 있는 실천
”혼자가 아니야”라는 감각은 누군가 대신 말해줄 때 생깁니다. 직장에서의 첫 걸음은 간단할 수 있습니다.
▶ 우리 조직의 취업규칙에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항목이 명시되어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 팀 내 다양성 교육을 제안해보는 것도 좋은 시작입니다.
“누구나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를 고민해온 여러분께, 성소수자도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일터는 어떠해야하는지, 이들과 ‘함께 살아갈 방식’이 무엇인지 고민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소개해드린 연구에는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가 참여하였습니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는 퀴어 및 앨라이 노무사가 퀴어의 다양한 직장문제에 대한 무료 법률상담을 제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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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 이번 기사는 어떠셨나요?
오이레터의 모니터링에 참여해주세요. 기사에 대한 의견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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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레터는 대한직업환경의학외래협의회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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