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보건현장에서 의사, 간호사, 위생사 등 다양한 전문가들이 각 자의 전공용어로 소통하며 겪는 어려움. 보건관리 업무를 하다 보면, 한 사업장에서 유기용제를 다루는 근로자의 건강 문제가 제기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산업위생사는 작업환경측정 결과와 노출 기준 초과 여부를 이야기합니다. 의사는 특수건강진단 소견과 질병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간호사는 건강관리 프로그램과 추적 계획을 이야기합니다. 모두 같은 근로자의 같은 문제를 두고 말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산업보건 현장에 들어온 사람이라면 직종을 가리지 않고 한 번쯤 겪었을 장면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낯선 감각이 단지 경험 부족에서만 비롯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수건강진단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지,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어떻게 적용할지, 업무관련성을 어떻게 평가할지. 이런 질문을 풀기 위해 해마다 적지 않은 시간과 자원이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비슷한 질문은 되풀이됩니다. 저는 그 이유를 지식의 부족보다 언어의 부족에서 찾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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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처음에는 말이 매끄럽게 통하지 않습니다. 특히 식민지 시대처럼 폭력과 강제가 겹친 역사 속에서는 더 그랬을 것입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아프리카인, 그리고 유럽에서 온 사람들은 서로의 언어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아가야 했습니다. 저명한 언어학자인 스티븐 핑커는 『언어 본능(The Language Instinct)』에서 이런 언어 형성의 과정을 널리 소개했습니다.
처음 생겨난 언어는 매우 단순했습니다. 이를 피진어라고 부릅니다. 피진어는 서로의 말을 충분히 익힐 겨를도 없이, 당장 일을 하고 지시를 주고받고 생존하기 위해 만들어 낸 최소한의 공통어였습니다. 그래서 문법은 거칠고 단순했습니다. 시제나 조동사, 인칭 같은 요소는 자주 빠졌고, 추상적인 개념보다 눈앞의 사물과 행동을 가리키는 말이 앞섰습니다. 말의 뜻은 정교한 문법보다 어순과 맥락, 몸짓에 더 많이 기대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언어를 들으며 자란 다음 세대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핑커가 자세히 다룬 언어학자 데릭 비커턴(Derek Bickerton)의 연구는, 다음 세대에서 문법이 더 정교해지고 시제와 조동사, 인칭 같은 구조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언어를 크레올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서툴고 단순한 말이었지만, 함께 살아가는 시간이 쌓이자 마침내 하나의 제대로 된 언어가 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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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저는 산업보건 현장을 떠올립니다.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산업전문간호사, 임상병리사, 산업위생사. 이름만 나열해도 서로 다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각자는 자기 분야에서 오랜 시간 언어를 다듬어 왔습니다. 문제는 그 언어들이 한 현장에서 만날 때입니다.
건강진단을 하고, 작업환경을 측정하고, 법에 정해진 기준을 적용하는 일은 반복됩니다. 그런데 정작 그 너머의 문제, 그러니까 이 물질이 왜 문제인지, 이 수치가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이 근로자의 상태를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순간이 되면 각자의 말은 조금씩 갈라집니다. 누군가는 기준치를 말하고, 누군가는 질병 가능성을 말하고, 누군가는 추적 관리를 말합니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말들이 하나의 문장으로 잘 엮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만든 연구보고서도 다른 직종에게는 낯선 언어로 읽히곤 합니다. 다시 풀어서 설명하다 보면, 애써 정리한 문제는 다시 처음 자리로 돌아옵니다. 산업보건의 어려움은 정보가 부족해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함께 묶어 줄 공통의 언어가 아직 충분히 자라지 못해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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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는 산업보건 현장에 필요한 일이, 서로 다른 전문가들이 함께 쓸 수 있는 공통의 사고 체계를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유하자면 산업보건의 피진어를 크레올어로 키워 가는 일입니다.
오래된 분야는 용어가 지나치게 세분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반대로 산업보건처럼 여러 분야의 사람이 모이는 영역은, 아직 공통의 언어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채 각자의 말이 병렬로 놓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결과 같은 질문이 반복되고, 같은 설명이 계속 되풀이됩니다. 현장에서 느끼는 답답함도 대개 그 지점에서 생깁니다. 모두가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같은 방향으로 말하고 있다는 확신이 부족한 순간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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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런 공통 언어는 저절로 생기기만을 기다리기 어렵습니다. 크레올어는 한 공동체 안에서 아이들이 자라며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지만, 산업보건은 구조가 다릅니다. 예방의학, 임상의학, 간호학, 공학, 통계학처럼 이미 단단한 체계를 가진 분야에서 전문가들이 각자의 언어를 가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산업보건의 공통 언어는 자연 발생이라기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만들고 다듬어야 할 언어에 가깝습니다.
이런 점에서, 폴란드의 안과 의사 루드빅 자멘호프(L. L. Zamenhof)가 1887년에 에스페란토를 창안했던 시도는 흥미로운 비유가 됩니다. 물론 산업보건의 언어를 누군가가 단번에 발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모두가 함께 쓸 수 있는 언어를 고민하고, 가르치고, 반복해서 다듬는 일은 분명 필요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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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공통 언어의 문법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할까요. 저는 그 자리에 화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산업보건은 본질적으로 노출에서 시작합니다. 어떤 물질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경로로 인체에 들어오며, 그 뒤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가. 이 질문은 산업보건의 여러 직종이 각자의 방식으로 붙들고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임상의학이 질병 이후를 설명하고, 역학이 집단 수준의 패턴을 설명한다면, 산업보건의 고유한 영역은 그 앞단에 있는 노출의 특성과 거동을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밑바탕에서 설명하는 학문이 화학입니다.
화학은 서로 다른 직종이 결국 만나게 되는 공통 기반이기도 합니다. 벤젠을 떠올려 보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국제암연구소(IARC)는 벤젠을 인체에 대한 1급 발암물질(Group 1)로 분류하고 있으며, 특히 급성 골수성 백혈병과의 관련성에 대한 근거가 충분하다고 평가합니다. 벤젠이 불순물로 섞인 톨루엔이 더 저렴한 이유도, 벤젠이 인쇄용 롤러의 잉크를 잘 녹여내는 이유도, 벤젠이 체내로 흡수되고 대사되는 방식도, 위해성을 평가하고 측정하는 방법도 결국은 그 물질의 물리화학적 특성과 연결됩니다. 경제학의 언어로 말하든, 공학의 언어로 말하든, 의학의 언어로 말하든, 위생학의 언어로 말하든, 바닥에는 같은 문법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산업보건의 공통 언어를 이야기할 때, 화학을 빼놓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화학은 여러 직종 가운데 하나의 전유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직종이 같은 문제를 두고 마침내 만날 수 있게 해 주는 공통의 문법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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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보건 현장에는 이미 많은 지식이 있습니다. 부족한 것은 지식 자체보다, 그 지식을 함께 엮어 내는 언어일지 모릅니다. 저는 그 언어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만들고, 가르치고, 함께 다듬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중심에는 화학이 놓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통의 문법이 있을 때, 공통의 판단도 가능해집니다. 산업보건 현장에서 서로 다른 직종이 같은 문제를 두고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말하고,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산업보건에도, 여러 사람이 함께 키워 낸 자기만의 크레올어가 생겨나기를 바라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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