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건강진단을 하다 보면 노동자들에게 보호구 착용 여부를 묻게 됩니다. 귀마개, 마스크, 장갑 같은 보호구가 제대로 지급되고 있는지, 실제 작업 중에 착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귓구멍이 너무 작아서 귀마개가 안들어가거나 귀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장갑이 너무 커서 작업이 어렵습니다”
건설현장에서 형틀목수로 일해온 한 여성의 경우(기사링크) 는 조금 더 극단적입니다. 이 분의 안전대에는 여러 곳에 바느질 자국이 있습니다. 몸에 맞지 않는 안전대를 직접 접어 꿰매어 줄여 쓴 흔적입니다. 키 151cm, 발 크기 225mm인 이 노동자에게 현장에서 지급되는 보호구는 대부분 크기가 맞지 않습니다. 안전대는 어깨에서 흘러내리고, 안전화는 최소 사이즈가 235mm라 깔창을 여러 겹 넣고 두꺼운 양말을 신어야 겨우 맞출 수 있습니다.
건설현장은 변화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특정 개인의 특별한 사례만은 아닙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건설현장의 인력 구성 자체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건설근로자공제회 자료에 따르면 건설업 여성 노동자는 2020년 약 20만 8천 명에서 2024년 약 25만 9천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전체 건설업 종사자 중 여성 비율도 약 12% 수준까지 늘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주로 자재 정리나 현장 정돈, 마감 작업 보조 등 비교적 단순 작업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지만, 형틀목수나 철근 작업 등 다양한 공정에 참여하는 사례도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보호구 ‘적합성’ 문제 역시 점차 구조적인 문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20년에 수행한 「여성 건설근로자 취업현황과 정책방안」 연구에서는 여성 건설근로자의 약 56%가 보호구가 몸에 맞지 않는 경험을 했다고 응답했습니다. 장갑이 크거나 안전모가 헐거워 작업이 어렵다는 사례들이 보고되었습니다.
2025년 사회건강연구소가 발표한 「건설업 여성 노동자의 노동과 건강」 연구에서도 현장에서 지급되는 보호구가 체형에 맞지 않아 불편을 겪는 사례들이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산업안전 장비와 작업도구의 설계는 대부분 인체측정 자료(anthropometry)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인체공학 설계에서는 가능한 한 다양한 사용자 체형을 포괄하기 위해 여성 중 작은 편에 속하는 약 5%의 신체 크기부터 남성 중 큰 편에 속하는 약 5%의 신체 크기까지, 즉 전체 인구의 약 90%를 포함하는 범위를 고려하는 것이 권장됩니다. 그러나 실제 산업 제품 설계에서는 오랫동안 평균적인 남성 체형(50th percentile male)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사례가 적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설계 기준의 상당수는 미군 인체측정 조사인 [ANSUR(Army Anthropometric Survey)]와 같은 대규모 인체측정 데이터에 기반해 왔습니다. 이 조사에는 여성 군인의 신체 치수도 포함되어 있지만, 실제 산업 장비와 보호구 설계에서는 오랫동안 성인 남성 인체측정 자료가 설계 기준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설계 관행은 보호구에서도 확인됩니다. 보호장갑 규격(EN 420 / ISO 21420)은 장갑 사이즈를 손 둘레(hand circumference) 기준으로 정의합니다. 예를 들어 사이즈 8은 손둘레 약 203 mm, 사이즈 9는 약 229 mm에 해당합니다. 실제 산업용 장갑에서는 이 두 사이즈 가운데 하나가 중간 사이즈(M)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현장에서 소형 사이즈(S) 등 이보다 작은 규격의 장갑이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다면 여성 노동자나 체격이 작은 남성 노동자, 고령 노동자 등은 장갑이 맞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장갑의 밀착도와 작업 수행성에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결국 보호구의 ‘적합성(suitability)’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보호구는 작업자에게 맞아야 한다
보호구가 작업자에게 맞지않는 문제는 단순한 불편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호구가 제대로 밀착되지 않으면 방호 성능이 떨어지거나 오히려 새로운 위험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32조에서는 사업주가 ‘작업에 적합한 보호구’를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미국 OSHA 규정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PPE must properly fit each affected employee (보호구는 해당 작업자에게 적절하게 맞아야 한다)”
일부 국가에서는 실제 현장 개선 사례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해외 제도 및 사례를 다룬 국내 보고서에 따르면, 영국의 공공 교통기관인 Transport for London(TfL)은 여성 노동자를 위한 개인보호구와 작업복을 별도로 설계하는 시범사업을 진행했습니다. 기존 보호구가 남성 체형을 기준으로 제작되어 착용감과 작업 효율 문제가 발생한다는 현장의 문제 제기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해외에서는 보호구를 단순히 ‘지급되는 장비’가 아니라 실제 노동자에게 맞게 작동하는지 확인해야 할 안전관리 요소로 보는 논의가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마치며: 일하는 다양한 몸의 안전을 위하여
건설 현장은 물리적 위험 요소가 산재해 있어 정교한 관리가 요구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관리의 대상이 되는 노동자들의 특성 또한 점차 다변화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들리는 “보호구가 불편하다”는 이야기는 보건관리에서 놓치고 있던 중요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보호구를 지급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업자에게 실제로 맞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를 거창한 제도 변화의 문제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현장에서 당장 확인해볼 수 있는 질문들을 제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