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어떤 개입이 가장 효과적인가”라는 질문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개입 하나하나의 순서와 조합이 어떤 흐름을 만들어내는지가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는 직무요구가 바뀌고 상사의 리더십이 바뀌고 동료 관계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떤 하나의 개입이 항상 정답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심리사회적 위험 개입 우선순위는 “이 중에서 무엇이 최고인가를 고르는 리스트”라기보다 이 회사가 어떤 가치를 목표로 삼고 어떤 흐름을 만들어갈 것인지 생각할 때 참고하는 지도로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직무요구를 지금 당장 낮출 수 없다면 다른 요소를 어떻게 보완해서 직원들이 버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만족을 느낄 수 있게 할 것인지 그 조합과 순서를 고민하는 데 이 틀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때 교육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달라집니다. 특히 중간관리자 교육은 조직이 지향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위 단계에서 결정된 방향을 팀의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교육과 상담이 위험 개입 우선순위의 맨 아래에 있다고 해서 쓸모없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방향을 향해 움직일지 정한 뒤 그것을 사람들과 나누는 수단에 가깝게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입니다.
소개한 논문에서는 덴마크의 감독 프로그램에 참여한 9개 사업장을 분석했습니다. 각 사업장이 어떤 개입을 했고 그것이 심리사회적 위험 개입 우선순위의 어느 단계에 해당하는지 분류한 뒤 직원과 관리자의 경험을 함께 정리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사례들을 보며, 조직 수준 개입은 복잡하고 성공률도 낮지만 결국 위험을 줄이려면 이 단계를 피해갈 수 없다고 정리합니다. 정책과 프로그램은 상대적으로 만들기 쉽고 외부에 보여주기도 좋아서 실제 조건을 바꾸기보다 문서와 교육 위주로 흐르기 쉽다는 점도 지적합니다. 그래서 심리사회적 위험 개입 우선순위는 어떤 수준의 개입이 가능한지 현실을 감안하면서도 가능한 한 위 단계부터 검토해 보자는 제안을 담고 있습니다.
조직개입이 필요한 이유: 비용과 웰빙 워싱
현장에서 중간관리자는 스스로 결정하기보다 경영진을 설득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심리사회적 위험 개입 우선순위는 왜 조직 수준 개입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설명하는 도구로 쓰일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외 보고서에서는 정신건강 개입의 투자 대비 효과를 분석하면서 개입 시점과 대상, 개입 수준에 따라 투자 대비 수익이 달라진다고 정리합니다. 대체로 조기 개입일수록, 조직 차원의 조건을 손댈수록, 더 넓은 직군을 대상으로 할수록 투자 대비 효과가 커지는 경향이 보고되었습니다. 개인 교육과 상담만으로는 조직이 지는 비용을 줄이는 데 한계가 있고 일정 수준 이상 효과를 내려면 업무량과 시간배치, 리더십과 조직문화 같은 상위 단계 개입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보고서] 직장 정신건강 투자와 ROI 분석; Mental health and employers: The case for investment – Deloitte 보고서
한편 개인 수준 웰빙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적 논의도 있습니다. 회복력 훈련, 마음챙김, 웰빙 앱처럼 나 자신을 잘 돌보는 법을 가르치는 개입은 단기적인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일 자체의 요구와 조건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직장을 바꾸지 않고 직원을 바꾸려 한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합니다. 업무환경은 그대로 두고 겉으로만 웰빙 활동을 홍보하는 현상을 두고는 "웰빙 워싱"이라는 표현도 사용됩니다.
[논문] Employee well-being outcomes from individual-level mental health interventions: Cross-sectional evidence from the United Kingdom
[논문] Current understanding and theories of wellbeing washing in the context of workplace health and wellbeing: A scoping review protocol
우리 현실에서는 사실 웰빙 워싱이라 부를 만한 것조차 부족한 곳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을 서로를 비난하는 도구로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논의를 알고 있으면, 교육과 상담을 기획할 때 스스로 묻게 됩니다. “이 개입이 일하는 조건을 바꾸는 흐름 안에 놓여 있는가, 아니면 직원만 바꾸라는 메시지로 들리지 않을까” 를 점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궁극적으로는 개입을 비난하기보다, 우리가 설계하는 프로그램이 어느 단계에 서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보자는 제안에 가깝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KOSS 평가 이후를 설계하기
우리나라에서 KOSS를 활용해 직무스트레스를 평가한 뒤 사후관리를 고민하면 많은 경우 교육과 상담, 지침 정비에 머뭅니다. 스트레스 교육을 하고 마음건강 특강을 열고 필요하면 상담을 연계하고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지침과 같은 문서를 정비합니다. 담당자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업무량, 인력, 시간 배치 같은 조건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개인에게만 더 잘 버티라고 권하는 상황이 되기 쉽습니다. 그럴수록 담당자 입장에서도 이 다음에 무엇을 제안할지 막막해질 수 있습니다. 이때 심리사회적 위험 개입 우선순위는 방향을 가다듬는 데 도움이 되는 틀입니다.
예를 들어 KOSS에서 업무요구 점수가 높게 나온 사업장을 만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 경우 대부분은 “업무량이 많다” “시간에 쫓긴다”와 관련된 문항 점수가 함께 올라가 있습니다. 이때 교육과 상담을 떠올리기 전에 한 번 정도는 이렇게 거꾸로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요인을 악화시키는 조건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는 여지는 없는가.
둘째, 그것이 어렵다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나 순서를 바꿀 수는 없는가.
셋째, 그래도 어렵다면 그 다음으로 어떤 정책과 절차와 교육이 필요할까.
현실적으로는 높은 단계 개입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위 단계에서부터 생각해 보고 불가능한 부분을 내려오면서 조정한다는 관점을 가지면, 같은 교육과 상담이라도 위치가 달라집니다. 교육을 통해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조건을 바꾸기 어렵고 그래서 당장은 이 수준부터 함께 해 보자는 맥락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직장은 항상 변합니다. KOSS 결과도 매년 똑같이 나오지 않습니다. 직무요구가 달라지고 상사와 동료 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개입도 한 번으로 끝나는 처방이 아니라 흐름을 설계하는 작업에 가깝습니다. 회사가 좋은 직장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지, 즉 직무스트레스를 어느 수준에서 조절하면서 직원의 성장과 만족을 함께 추구할 것인지 가치와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에 맞추어 인력과 시간과 리더십 교육 같은 자원을 조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간관리자는 이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위에서 정한 방향과 원칙을 각 부서의 언어로 풀어내고 현장의 상황을 다시 위로 올려서 조건을 조정하도록 요청하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사회적 위험 개입 우선순위는 이들이 “지금 이 회사가 어느 단계에 더 투자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필요하면 경영진과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체크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마무리: 좋은 직장을 향한 방향성
직무스트레스 개입에서 교육과 상담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다만 그 이전에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틀이 하나 있으면 좋습니다. 심리사회적 위험 개입 우선순위는 그런 순간에 참고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현실의 제약 때문에 결국 낮은 단계 개입만 실행하는 상황이라도, 적어도 한 번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검토했는지 스스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KOSS 결과 설명이나 사후관리 계획을 짤 때 오늘 소개한 세 가지 질문을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이 요인을 악화시키는 조건을 줄일 수 있는지, 그 다음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과 구조를 바꿀 수 있는지, 마지막으로 어떤 정책과 교육이 필요할지 순서대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각 조직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방향을 구체화할 수 있다면, 같은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조금씩 다른 “좋은 직장”의 길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