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심리사회적 위험을 다루는 연구는 대체로 우울증이나 번아웃 같은 질병 수준의 결과를 기준으로 제안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접근에는 두 가지 큰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예방적 시점에서 너무 늦습니다. 질병이 발현된 이후 기준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은 근본적인 원인을 통제하는 1차 예방과는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소음 노출의 경우 85dB(A)을 8시간 노출 기준치로 정해 그 이상이면 보호구 착용과 작업환경 관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직무스트레스 같은 심리사회적 위험은 이런 예방적 기준이 없이 질병이 발생한 뒤에야 위험했다고 말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둘째, 실제 안전선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통계적 cut-off 값은 민감도와 특이도의 균형에 맞춘 인위적 경계일 뿐 근로자의 건강을 직접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건강 기반 기준(health-based thresholds) 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컨대 KOSS 설문 점수의 중위수를 기준으로 삼으면 상대적 비교에는 유용하지만 이 값이 곧 건강에 영향을 주는 ‘절대적 임계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직업-노출 매트릭스(JEM, Job Exposure Matrix)나 이해관계자 워크숍을 통한 합의 방식도 활용되고 있지만 이 역시 한계가 있습니다. JEM은 직업군 평균에 근거하기 때문에 개별 근로자의 위험을 놓칠 수 있고 워크숍 합의는 이해관계자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방법들은 현장에 참고 자료는 되지만 “어떤 수준부터 근로자 건강에 실제로 해롭다”라는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네 가지 제안
연구는 앞으로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아가야 할 네 가지 방향을 제시합니다.
① 조기 신호를 기준으로 삼자
질병 단계가 아닌 피로, 짜증, 집중력 저하 같은 초기 반응에서 기준을 설정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화학물질에 적용되는 무유해영향수준 (NOAEL, No-Observed-Adverse-Effect Level), 최저유해영향수준 (LOAEL, Lowest-Observed-Adverse-Effect Level) 개념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② 원인–용량–효과 관계를 명확히 하자
현재는 연속적 데이터를 단순히 건강 혹은 질병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노출 수준이 높아질수록 건강에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 용량–반응 곡선을 정밀하게 그려야 합니다.
③ 일반화 가능한 기준을 만들자
대부분의 요인은 설문도구 간 결과를 데이터 조화해 직종 특성에 맞는 기준을 마련해야 합니다. 하지만 직장 내 폭력이나 성희롱처럼 명백히 해로운 요인은 별도의 한계를 정하기보다 무관용(zero tolerance)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④ 합의 구조를 제도화하자
화학물질 OEL처럼 다양한 연구 결과를 종합하고 공식 협의체에서 합의하는 과정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야 합니다.
신약 개발처럼 단계적으로
연구에서는 심리사회적 유해요인의 노출기준(OEL) 개발 과정을 신약 개발에 비유했습니다. 새로운 약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개념을 정의하고, 실험실에서 검증하고, 임상 연구를 거쳐 전문가 합의를 이루고, 이후에도 꾸준히 모니터링을 하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심리사회적 유해요인 OEL 연구는 이러한 과정을 건너뛴 채, 단면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성급히 cut-off 값을 제안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쉽게 말해, 약을 충분히 시험하지 않고 곧바로 시장에 내놓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 단계적이고 체계적인 절차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먼저 어떤 위험요인을 기준으로 삼을지 정의하고 그 조기 반응(예시: 짜증, 피로)을 확인하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다음에는 간호사, 제조업, 공무원 등 다양한 집단을 대상으로 한 역학 연구를 통해 결과가 일반화되는지 검증해야 합니다. 이후에는 학자, 노동계, 기업, 정책 전문가가 모여 연구 결과를 종합해 공신력 있는 기준을 합의하는 과정이 뒤따릅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마련된 기준이 현장에서 실제로 예방 효과를 가지는지를 장기적으로 살피고 필요하다면 조정하는 모니터링 단계가 뒷받침되어야합니다.
맺음말 - 심리사회적 문제를 과학적 언어로 말하기
이러한 노력이 성공적으로 결실을 맺는다면, 언젠가는 심리사회적 요인에도 화학물질처럼 “이 수준은 안전하다, 그 이상은 위험하다”라는 기준이 마련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예방을 위한 관점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앞으로 현장에서 “이 정도 스트레스는 관리가 필요하다”라는 말을 경험이 아닌 과학적이고 표준화된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