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正): 스마트 기술이라는 새로운 약속
산업 현장에서 스마트 안전기술 도입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처럼 보입니다. 특히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많은 기업은 사고 예방과 원인 규명을 위한 대책으로 스마트 기술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지능형 CCTV, 사물인터넷(IoT) 센서가 부착된 안전모와 안전대, 바디캠,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통합 관제 플랫폼은 작업자의 불안전한 행동을 감지하고 위험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기대를 낳습니다.
이러한 기술은 크게 세 가지 경로로 현장에 도입됩니다.
-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 사고 재발 방지 대책의 일환으로 도입됩니다.
- 이동/방문 노동: 고정된 사업장 관리가 어려운 노동자들의 작업을 통제하고 안전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됩니다.
- 공공기관: 시민의 안전과 편의를 명분으로 도입됩니다.
이처럼 스마트 기술은 '안전'이라는 명분을 통해 현장의 낡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한 대안, 즉 '정(正)'으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흐름은 더 큰 혁신의 담론과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날 AI와 같은 디지털 기술은 공장과 같은 물리적 기반 없이도 무한 복제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급력을 지닌 혁명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스마트 기술 도입은 단순히 개별 사업장의 안전을 넘어,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산업 시대를 열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기술의 도입 이면에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합니다. 스마트 기술 도입의 숨겨진 의도로 '노동자 감시'가 지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고 예방을 위한 기술이 손쉽게 노동자의 행동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술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反): 약속의 이면에 숨겨진 통제와 딜레마 - 안전인가, 통제인가?
실제 사례를 보면, 스마트 안전기술은 하청, 이주, 여성 노동자와 같은 특정 집단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어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작업을 통제하기 위해 바디캠 착용을 의무화하거나 , 이주노동자의 허위 기성 등록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안면인식기를 설치하는 식입니다. 이는 결국 '재해자 과실론'의 새로운 버전으로, 시스템의 근본적인 위험 요인을 개선하기보다 노동자의 행동을 통제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흐를 위험이 큽니다.
실효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 더 큰 문제는 기술의 실효성입니다. 안전보건 대책은 위험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공학적 대책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현재 도입되는 스마트 기술 다수는 개인보호구(PPE)에 센서를 부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는 정보만 수집할 뿐, 위험 자체를 줄이지는 못하는 한계를 가집니다. 예를 들어, 지난 8월에 발생한 코레일 산재 사망 사고 당시 하청 직원에게 열차 접근 알림 앱을 지급했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열차가 운행하는 시간에 선로 유지보수 작업을 시행하는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기술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동의 절차의 함정 도입 과정 역시 문제입니다. 노동조합과의 집단적 합의 대신 '개인정보 활용 동의'라는 형식으로 개별 동의를 받아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빈번합니다. "동의하지 않을 시 작업장 출입을 금할 수 있다"는 식의 강압적인 동의서는 노동자의 프라이버시 권리를 오히려 집단적 노동권을 침해하는 데 악용하는 사례입니다.
합(合): 현장을 위한 진정한 스마트를 향하여
그렇다면 우리는 신기술이라는 증기선을 무조건 거부하고 낡은 전함의 시대를 그리워해야만 할까요? 진정한 혁신은 기술 도입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현장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고 인간의 가치를 높일 때 완성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동의 해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1. 문제의 재정의: '위험을 줄이는 기술'부터 작고 확실하게
가장 먼저, 복잡한 관제 시스템보다 당장의 사고를 줄일 수 있는 장치에 집중해야 합니다. 밀폐공간의 가스를 자동 차단하는 설비, 지게차 충돌 방지 장치처럼 개인정보 수집 없이도 효과가 확실한 공학적 대책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90일 내 지게차-보행자 충돌 30% 감소"와 같이 단순하고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작은 시범 사업으로 시작해 성과를 검증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2. 데이터 주권과 집단적 합의
데이터는 꼭 필요한 만큼만 최소한으로 수집하고, 목적 외 사용을 엄격히 금지하는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또한, 개별 동의서가 아닌 노동조합이나 근로자 대표와의 집단적 협의를 통해 도입 절차의 신뢰를 확보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산업안전보건 전문가들은 "이 기술이 정말 위험을 줄이는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던지는 '비판적 동반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3. 성과와 책임의 공유 구조 설계
기술 도입과 동시에 평가 방법을 명확히 정하고, 그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합니다. 기술 공급업체와는 오탐지율이나 사고 감소율 등 구체적인 성과 지표를 계약에 명시하여 책임성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 과정은 노사, 안전팀, 경영진, 외부 전문가가 함께 참여하는 합동위원회를 통해 논의되어야 합니다.
결론: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결국 스마트 안전기술 도입은 단순히 기술을 선택하는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가 어디에 더 높은 가치를 두는지에 대한 철학적, 정치적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효율성과 통제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노동 존중과 생명 우선의 가치를 지킬 것인가?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영화 <007 스카이폴>에서 007은 결국 낡은 시대를 상징하던 M의 죽음을 딛고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습니다. 우리 산업보건의 최전선에 있는 전문가들 역시 신기술의 명과 암을 직시하고, 그것이 감시가 아닌 보호의 도구로, 통제가 아닌 자율의 기반으로 작동하도록 끊임없이 질문하고 개입해야 하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진정한 '스마트'는 기술 자체의 똑똑함이 아니라, 그 기술을 사용하는 우리의 지혜에 달려있습니다.
[참고자료]
스마트안전보건기술의 윤리적 철학적 원칙 제안 연구, 일환경건강센터
스마트안전기술 도입 사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전주희
산업안전보건 스마트 기술 도입의 윤리적 철학적 원칙 제안, 최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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