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대한직업환경의학회 가을학회 <직업의학의 전문직업성, 위기와 대안 그리고 윤리>의 핵심요지를 정리한 것입니다. 주요 내용은 안덕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장) 교수님의 최근 칼럼, 기고, 논문의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전문직업성이란?
전문직업성이란 전문가의 공적 신뢰를 뒷받침해주는 가치, 품행, 관계 등의 집합체입니다. "Professionalism"에 해당하는 우리 말이죠. 전문직업성의 기반은 면허제도를 통해 독점적인 권한과 판단의 자율성을 보장받는 대신, 자체적인 통제력을 갖추고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암묵적 사회계약에 있습니다.
개인적 전문직업성과 집단적 전문직업성의 차이
개인적 전문직업성은 의사 개인차원의 가치와 의무, 덕목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이타성, 환자에 대한 열정, 실력 등이 있습니다. 개인적 전문직업성은 동서양의 문화가 모두 공유하고 있는 담론으로 우리나라도 유교적인 전통과 함께 자연스럽게 확립되었습니다.
반면, 집단적 전문직업성(Collective professionalism)은 전문직 개개인이 모여 하나의 집단을 형성할 경우, 개개인이 추구하는 것이 집단적 가치로 승화되어 집단적인 규약의 차원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전문직의 회원들은 자신들의 단체가 추구하는 합의된 규약을 준수해야 할 의무를 갖게 됩니다.
이 원고는 개인적 전문직업성이 아니라 집단적 전문직업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문직업성의 3요소
의사의 전문직업성은 3가지 요소, 즉 임상적 자율, 전문가 윤리, 자율규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임상적 자율적 판단은 의료라는 사회적 재원이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전문가 윤리는 환자와 사회부터 신뢰를 얻기 위한 전문가의 행동과 태도의 규범입니다. 자율규제는 합의된 전문가윤리를 훼손하는 행위를 하는 회원을 규제하는 것입니다.
전문직업성 위기의 역사적 사례
전문직업성의 위기는 오랜 과거에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가령 흑사병의 시대에 전염병을 진료하지 않으려는 의사, 동료를 보호하는 것을 우선시 하는 의사 길드 공동체, 20세기 초 인간을 대상으로 한 비윤리적 실험은 전문직업성의 위기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성찰과 대안을 모색하면서 전문직업성은 새롭게 구성되었습니다.
최근 임상적 자율의 위기
현대사회의 전문직업성의 위기는 보다 구조적이고 복잡합니다. 임상적 자율의 위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경영자의 개입으로 수익을 위해 의사가 불필요한 검사나 치료를 시행함
-보험회사의 개입으로 의사가 필요한 검사나 치료를 시행하지 못함
-소비자주의의 강화, 제한없이 공급되는 의료로 인해 소비자 주도로 선택이 이루어짐
-사회적 조정 체계가 없어 의료소송이 남발되어 의료행위의 범위가 제한됨
한국의사들의 자율규제가 확립되지 못한 배경
19세기 중엽, 영국의사회는 길드공동체적 분위기로 회원들에 대한 자율규제가 어려운 상황이 되자, 의회를 설득하여 영국의학협회(General Medical Council)를 만듭니다. 영국의학협회는 의사면허를 발급하고 관리하는 기관으로 정부와 독립적으로 회원을 징계하거나 규제할 수 있습니다. 이 제도를 통해 자율규제를 위한 사회적 구조를 확립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유교문화권에 속해있어 전문직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식민지시대와 개발독재를 거치면서 정부주도의 전문가 규제가 일반화되면서, 자율규제에 기반한 집단적 전문직업성이 발전할 기회가 부족했습니다.
의대정원사태가 가속화시키는 전문직업성의 붕괴
의대정원사태의 발생은 인구감소와 지방소멸로 인한 지역의료의 위기, 대형 민간병원의 경쟁 심화, 비보험진료에 의한 수익구조의 왜곡이라는 조건 속에서 정치의 포퓰리즘화가 빚어낸 참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참사에 대한 현 정부의 인식과 대응 방식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의대정원사태로 인해 임상적 자율, 전문가 윤리, 자율규제의 3가지 요소에서 균열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국가주도의 규제가 강화되면서 전문직업성은 설자리를 점점 잃고 있습니다. 그 결과, 환자와 의사들은 모두 각자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물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에 이를까 걱정됩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그 동안의 노력들
위기 속에서도 의사의 직업전문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습니다. 자율적인 민간평가기관으로 출발한 한국의학교육평가원은 의학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의사면허관리제도를 도입하여 자율규제를 정착시키려는 노력도 해오고 있습니다. 연명의료결정제도를 도입하여 윤리적 사안에 대한 사회적 협의제도를 만들어낸 경험도 있습니다. 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하여 자발적인 표준권고안을 만들어 근거에 기반한 임상적 자율성을 추구해 왔습니다. 이러한 변화와 시도는 의사들 사이에서 전문직업성에 대한 자각 수준을 보여줍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
전문직업성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새로운 사회계약은 아래와 같은 질문에 답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보유한 의료자원을 어떤 방식으로 분배할 것인가?
-의료에서의 갈등상황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전문가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 사회는 어떤 지원을 할 것인가?
이러한 사회계약 속에서 전문가집단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가 명확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순서로 진행되어야 할까요? 현재와 같은 전문직업성의 위기 상황에서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먼저 만들어진다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그래서 방법은 전문직업성을 형성하기 위한 전문가집단의 선도적인 노력에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글쓴이: 송한수 (오이레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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