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요양보호사가 된 윤옥 씨 이야기
50대 여성 윤옥 씨는 30여 년 동안 수도권에서 콜센터 노동자로 일해왔습니다. 그러다 재작년 팔순을 훌쩍 넘긴 노모가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6개월간 재활병원에서 급성기 재활 치료를 받은 후 집으로 가고 싶어 하셨습니다. 미혼인 윤옥 씨는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어머니가 재활병원에 계시는 동안 윤옥 씨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가족요양보호사가 되었습니다.
내 가족을 돌보는 재가 요양보호사로 수개월간 일한 윤옥씨는 우측 손목의 건초염을 진단받고 수술적 치료를 받았습니다. 윤옥씨를 수술한 정형외과 의사는 윤옥씨의 직업이 “요양보호사”라는 말을 듣고 산재를 신청해 보라고 권유했습니다.
가족 요양보호사의 ‘업무상’재해
가족 요양보호사 제도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일종으로, 자격증을 딴 요양보호사가 장기요양등급을 받은 가족을 집에서 직접 돌보는 서비스입니다. 가족 요양보호사가 지역의 재가 방문 요양센터에 가족 요양을 신청하면 일반적인 경우 하루 60분, 월 최대 20일이 노동 시간으로 인정됩니다.
만약 돌봄의 대상이 폭력적이거나 치매, 피해망상 등 문제 행동을 보일 경우 하루 90분, 월 최대 31일의 노동시간을 인정받습니다. 가족 요양보호사 시급은 국가에서 정해주지 않기 때문에 재가복지센터마다 시급이 다르고, 소속된 민간 재가복지센터의 기준에 따라 가족 요양 급여를 받습니다.
앞서 소개한 윤옥 씨의 경우 어머니께서 치매를 진단받아 하루 90분, 일 최대 31일의 근로를 인정받았고, 그에 따르면 윤옥씨의 노동자성이 인정되는 시간은 월 46.5시간입니다. 그 외 윤옥 씨의 시간은 계산되지 않은 돌봄 노동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윤옥씨는 수술 후 회복 기간에 어머니를 모실 수 없어 요양병원에 모셨습니다. 본인은 요양보호사로 같은 병원에 취직했다가 어머니께서 적응에 어려움을 겪어 다시 집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윤옥씨는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아니, 산재 승인 여부를 넘어 다시 충분히 요양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여러 명의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각색한 윤옥씨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서 돌봄을 둘러싼 씁쓸한 의제들을 복합적으로 보여줍니다. 여성에게 전가되는 가족 내 돌봄의 책임, 가족 돌봄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돌봄 노동의 주체에 대한 고려는 없는 가족 요양 제도, 돌봄의 난이도가 높은 대상자의 경우 돌봄이 사회화 되기 매우 어려운 현실, 가족 돌봄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문제와 더불어 ‘아프면 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픈 가족을 돌보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돌봄에 노동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돌봄에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아 계산되지 않는 무급 돌봄 노동의 가치를 재화로 환산해보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그 결과야 어쨌든 돌봄의 가치는 여전히 정량화되기 어려운 채로 남아있습니다. 그럼에도 돌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돌봄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우리는 돌봄 노동은 사회 유지를 위한 필수 노동이라 일컫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 2024년 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112차 총회에서 ‘괜찮은 일자리와 돌봄 경제(Decent Work and Care Economy)’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ILO는 돌봄 경제*가 전 세계적으로 3억 8,100만 개의 일자리로 구성되고 전체 고용의 약 11.5%에 해당하며, 2018년 보건, 교육 및 사회 복지 부문이 전 세계 GDP의 8.7%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될 만큼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고 밝혔습니다.
*돌봄 경제 : ILO 결의안에서 돌봄 경제는 단순히 특정 산업이나 직업군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의 모든 층위에서 이뤄지는 돌봄 관련 활동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정의함
동시에 안건 채택의 이유로 “성평등, 다양성, 통합, 모든 사람을 위한 돌봄 생태계 구축 등 사회경제적 전환기의 개혁 의제로서 돌봄에 대한 통합적 논의가 하루빨리 필요하다는 인식이 바탕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기사] “무급돌봄노동 가치, GDP 대비 최대 3%”
[ILO 보고서] Decent work and the care economy
돌봄 노동, 돌봄하는 몸들의 값어치
산업구조가 남성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여성들은 가사노동, 아이돌봄, 어르신 돌봄 등의 책임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돌봄은 노동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종종 어머니나 아내로서의 '희생'과 '봉사', 라는 미명 하에 가정 내에서 해결되어 왔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가 돌봄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고, 동봄의 사회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화된 돌봄 일자리 역시 저임금, 고용 불안정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22년 보건복지부의 사회서비스 공급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체 사업체(3,500개 사업체 대상)의 59.4%가 1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체로 나타났습니다. 공공분야 노동조합에서 진행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2023년 12월 기준 돌봄 노동자의 월 평균임금은 171.9만 원이며, 주휴수당, 연월차수당, 휴일근로수당, 연말 상여금을 모두 포함한 평균시급은 13,278원으로 법정 최저임금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는 돌봄노동자들이 영세한 사업체에서 낮은 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조건에 직면하게 되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연구보고서] 2022 사회서비스 공급 실태조사 연구보고서
[연구보고서] 돌봄노동자 임금실태조사
좋은 돌봄의 자리
가정에서 요양보호사를 부를 때, 좋은 요양보호사가 오기를 바라듯이, 요양원에 가족을 맡길 때도 가족이 좋은 돌봄을 받고 회복하여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먼 미래에 내가 돌봄이 필요한 위치에 처했을 때, 나를 돌봐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좋은 돌봄의 자리란 다른 노동현장과 마찬가지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가 일하기 좋은 환경이어야 합니다.
서울시 사회서비스원(이하 ‘서사원’) 은 민간기관이 수익성이 낮거나 서비스 강도가 높아 수행하기 어려운 공공성 높은 서비스를 수행해온 대표적인 공적 돌봄 기관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상자의 상태가 중증이어서 한 명 이상의 요양보호사가 필요하거나, 이동 시간이 길거나, 하루에 여러 차례 방문이 요구되는 난이도가 높은 돌봄 서비스는 민간 기관이 담당하기 어렵습니다. 영세한 민간 기관의 입장에서는 수익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적 돌봄 기관이 이러한 서비스를 담당해 왔습니다.
그런데, 2024년 11월 1일 부로 서사원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민간 시장보다 높은 요양보호사 급여, 야간 및 주말 운영 제한 등 방만한 경영이 해산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공적 돌봄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돌봄노동자의 고용조건이 안정적이어야 하고, 합리적인 수준의 처우가 이루어져야 하고, 교육훈련 시스템과 인사 시스템도 체계화되어야 합니다.
서울시는 서사원 해산에 따른 돌봄 공백을 막고 서비스 질을 향상하기 위해 ‘서울시 공공돌봄강화위원회’를 구성하고, ‘서울시 돌봄서비스 공공성 강화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서울시의 기조는 공공의 역할을 ‘직접 서비스 제공’에서 ‘민간 지원·관리·육성’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기사] 서울사회서비스원 폐지수순..폐지조례 공포 [조선일보]
[안내] 전화 한통으로 맞춤 돌봄안내…'안심돌봄120' 10월 개통 [서울특별시:내손안의서울]
[기사] 민간에 맡기면서 공공 돌봄 강화하겠다는 서울시 [한겨레]
양질의 일자리로서의 돌봄 경제
ILO의 ‘괜찮은 일자리와 돌봄 경제(Decent Work and Care Economy)’에 관한 결의안에서는 양질의 돌봄 일자리를 위해 5R 프레임워크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5R 프레임워크는 모든 주요 정책 영역에서 돌봄을 주류화하고, 돌봄 경제를 위한 구체적인 법률, 정책 및 프로그램을 제안함으로써 돌봄 경제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전략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돌봄 경제가 그저 ‘일자리 창출’이나 ‘산업 활성화’를 넘어, 가정과 지역사회, 기업과 시장 영역의 돌봄 조직의 혁신과 평등, 공정과 통합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5R 프레임워크는 돌봄 노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Recognize)’하고 돌봄 부담을 ‘감소(Reduce)’ 시키며, 돌봄 책임을 사회 구성원들 간에 더 공평하게 ‘재분배(Redistribute)’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또한 돌봄 노동자에게 적절한 임금을 제공하고 사회보장제도의 적용과 경력개발 기회를 확대하는 ‘보상(Reward)’ 과 돌봄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정책 결정 과정에 반영하는 ‘대표성(Represent)’을 보장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보고서는 정부가 돌봄 경제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충분한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를 통해 비공식 돌봄 일자리를 공식화하고, 공식 일자리의 비공식화를 방지하며, 돌봄 노동자들에게 차별이 없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히 여성, 이주노동자, 소수인종 등 취약계층에 대한 차별을 예방하고 보호하는 정책적 노력이 중요합니다.
[ILO 보고서] Decent work and the care economy
10월 29일, 오늘은 국제 돌봄의 날
2023년 유엔 총회는 결의안(A/RES/77/317)을 통해 성평등과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이정표로 10월 29일을 ‘국제 돌봄 및 지원의 날(International Day of Care and Support)’로 선포했습니다. 결의안은 매년 회원국, 유엔 체제, 시민사회, 민간부문, 학계, 대중이 매년 국제 돌봄과 지원의 날을 준수 할 것, 여성의 무급 돌봄과 가사 노동의 불균형적 부담을 인정하고 여성의 역량 강화를 방해하는 구조적 장벽을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국제적 요구에 역행하듯이 국내에서는 외국인 가사근로자의 최저임금 차등적용 논란, 지역사회 기반 공공돌봄의 거점이던 서울시 사회서비스원 해산, 돌봄서비스의 시장 전가와 같은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돌봄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필수노동이라면 수익성과 효율성을 넘어 ‘좋은 돌봄의 자리’가 무엇인지, 노동의 주체들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부터 제고되어야 합니다.
올해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처음으로 국제 돌봄의 날을 기념하는 해입니다.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는 돌봄 주간으로, 통합 돌봄을 위한 토론회, 돌봄을 주제로 한 영화 상영, 돌봄 시민들의 증언 대회, ‘제대로 된 돌봄을 요구하는 돌봄 시민 행진’의 행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국제 돌봄의 날을 기념하며, 우리 사회에서 어떤 조건이 특정 존재를 약자로 만드는지, 약자를 약자로 만들지 않는 사회를 위해 좋은 돌봄이 어떻게 가능할지 모색할 때입니다.
글쓴이: 정지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젠더와 노동건강권 센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