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가정과 위험한 사업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첫 문장,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리나>의 도입부입니다. 이어지는 두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블론스키의 집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경기북부 직업병 안심센터 사업을 통하여 접하게 된 한 화학물질 중독 사건 때문에, 이 구절을 다시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단어를 조금 바꾼다면 한국의 산업안전보건이 처한 현실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안전한 사업장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위험한 사업장은 모두 제각각의 위험을 안고 있다. 한국의 산업안전보건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화학물질 중독이 발생할 위험이 있는 사업장의 모습은 제각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화학물질의 종류는 무한하고, 같은 화학물질을 사용하더라도 작업환경,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노출 경로와 노출 정도 역시 전부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은 위험한 사업장이 안고 있는 모두 제각각의 위험, 특히 화학물질 중독에 대한 수많은 위험을 얼마나 어떻게 담아내고 있을까요?
종이컵 유독물질 사건, 눈 앞의 불행조차 보지 못하다
지금부터 소개할 화학물질 중독 사건을 보면, 산안법과 중처법이 위험을 찾아내기는 커녕 눈 앞의 불행조차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건의 경과를 개략적으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사업장은 500인 이상 규모의 중소기업으로 광학렌즈를 제조하는 업체입니다. 작은 렌즈를 닦을 때는 세척용 용액을 종이컵에 담아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용액을 물로 착각한 30대 여성 근로자가 3분의 1 정도 마시면서 사건이 발생합니다. 불소 성분이 포함된 화학물질임을 인지하여 곧바로 응급실로 내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증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후 심실세동에 빠져 다른 응급실로 이송되었고 이 사건이 발생한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뇌사상태입니다.
고용노동지청, 경찰, 검찰 수사가 진행된 후, 1심 판결 결과가 나왔습니다. 종이컵에 세척용 용액을 담은 동료 근로자, 공장장, 안전관리자는 업무상 과실치상으로, 법인은 화학물질관리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유죄가 선고되었습니다.
산안법으로는 처벌되지 않아
문제는 산안법이 적용될 여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처벌의 근거가 되었던 화학물질관리법은 유해화학물질을 제대로 관리할 책임을 묻는 법입니다. 그러나, 근로자를 위한 법이 아니라, 환경오염과 국민 건강을 위한 법입니다.
형법상 업무상 과실치상이나 업무상 과실치사의 죄는 통상적으로 산안법과 상상적 경합[1]에 해당하여 동시에 기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산안법 자체로 기소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업장의 안전보건 관리 책임을 묻지 못한 것입니다.
그 결과 피해를 입은 근로자가 뇌사가 아니라 사망에 이르게 되더라도 중처법이 적용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 사건에서 산안법으로 사업장 안전보건 관리를 책임을 묻지 못하는 것일까요? 이 사건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답을 알 수 있습니다.
[1] 상상적 경합 이란 하나의 행위가 여러 개의 죄에 적용될 수 있는 경우로, 법 체계에서 가장 중한 처벌을 받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오래된 위험, 방치된 위험
일부 언론보도에서는 세척액을 불산 용액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물질은 이불화 암모늄(ammonium bifluoride) 또는 산성 불화 암모늄이라고 불리는 물질의 수용액입니다. 이 화학물질의 화학식은 [NH4][HF2]이며 암모늄 양이온과 이불화 음이온으로 이뤄진 이온 결합 결정입니다. 그래서, 물에 쉽게 녹습니다. 이불화 암모늄 수용액은 실리카(SiO2)와 만나거나 열이 가해지면 불화 음이온(F-, fluoride ion)을 방출합니다.
이불화 암모늄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수용액 상태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반도체 에칭 공정에서 불산을 대체하는 물질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렌즈 제조업 사업장에서도 다른 물질로 대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불화 암모늄 수용액을 음용한다면 체내에서 불화이온이 발생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불화 음이온으로 분해되면서 체내 혈액의 불화 이온 농도가 빠르게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곧 세포의 칼슘 이온을 빠르게 소진시키고, 가장 먼저 심근 세포가 멈추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의 임상 양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불화수소와 불화수소의 수용액인 불산은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규칙(이하 안전보건규칙)에서 정하는 “관리대상물질”입니다. 그러나 이불화 암모늄은 관리대상물질이 아닙니다. 이불화 암모늄이 독성을 발현하는 과정에서 불화 음이온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관리대상물질은 화학 반응의 중간체는 고려되지 않습니다. 화학물질을 목록으로 관리하는 현행 체계에서 이불화화합물은 불산과는 다른 물질입니다.[2]
[2] “관리대상물질”을 다루는 별표12의 비고에 이성질체에 대한 언급이 있으나 이성질체는 화학식이 같은 물질이어야 합니다.
이불화 암모늄의 독성은 이미 잘 알려져
이불화 암모늄이 첨단 산업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이고, 아직 위험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규제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차량의 아스팔트 얼룩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하던 세척제(road film remover)에 함유되어 사용되었던 물질이기 때문입니다.
무색무취의 수용액 상태라는 점이 오히려 근로자의 주의를 경감시켜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경고가 미국 OSHA에서 나왔습니다. 호주에서는 이불화 암모늄 뿐만 아니라 소듐이나 포타슘 양이온에 대한 불산화합물도 불산에 준하는 산업안전보건 조치를 시행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세차 관련 전문지에서는 2001년에 이불화 암모늄이 불산보다 안전하다고 광고하지만 치명적일 수도 있는 화학물질임을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OSHA는 불화화합물로 포괄적으로 관리
미국 OSHA에서는 이불화 암모늄을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규제 대상 물질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불화화합물(fluorides as F)로 포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화화합물이 위험성이 크지만 수많은 불화화합물을 목록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우므로 당연하면서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다만, 기체 상태로 노출될 수 있거나 다른 이유로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불화화합물은 다른 화학물질과 함께 별도로 규제를 만들어 한번에 다룰 수 있는 중량을 제한하고 있고, 이는 목록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이불화 암모늄은 여기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노출기준대상물질이지만 관리대상물질은 아니다
전혀 새로울 것도 없고, 위험도 잘 알려져 있으며, 대체하기도 어려운 이 물질이 왜 “관리대상물질”에 빠져 있는 것일까요? 더 황당한 것은 “노출기준대상물질”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 산안법의 “관리대상물질”은 안전보건규칙 <별표1>에서 목록화하며, 유기화합물 123종, 금속류 25종, 산 및 알칼리류 18종, 가스 상태 물질류 15종으로 181개에 불과합니다. 한편, 고용노동부고시인 화학물질 및 물리적 인자의 노출기준에는 “노출기준대상물질”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으며, 이 규정은 미국 산업위생협회(ACGIH)의 TLV©를 준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3] 이렇게 규정된 “노출기준대상물질”은 731개입니다. 그러나 이 물질목록은 산안법 상 보건조치 의무가 적용되지 않고 있어 실무적으로 의미가 크지 않습니다.
[3] 690번에 플루오라이드(Fluorides, as F)를 기술하고 있는데 여기 기재된 CAS 번호 7681-49-4는 소듐플루오라이드에 대한 것으로 OSHA 데이터베이스에서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불화화합물 CAS 번호(16984-48-8)가아닙니다. 오기로 생각됩니다.
환경부에서는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되고 있어
환경부의 화학물질안전원에서 고시하는 유독물질의 지정고시는 2024년 4월 1,012개의 물질을 지정하고 있으며, 이불화 암모늄은 음용 시 사망 사례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유독물질의 지정고시는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습니다.
환경부의 이 규정이 없었다면 사업장에 어떠한 책임도 묻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환경성 질병과 직업성 질병의 차이점을 생각한다면, 환경부 고시에도 미치지 못하는 산안법에서 다루는 규제가 얼마나 턱없이 부족한지, 업데이트조차 얼마나 느린지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중처법, 산안법, 산재법 간의 호환성이 떨어져
추가적으로, 중처법은 아직까지는 법 체계가 불완전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시행령 <별표1> 의 직업성 질병 목록에도 근본적인 모순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처법의 법리가 상당수 산안법에 의존하고 있는데 시행령 <별표1>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법)을 기초로 하여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산재법에서 다루는 직업병 목록은 질병판정위원회 체계로 인하여 예시적 규정의 성격을 갖습니다, 그래서, 산안법과는 다소 다른 인과판단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산안법에는 산재법에 없는 “특수건강진단 대상 물질”과 “작업환경측정 대상 물질”로 인한 중독이 추가됩니다. 그러나, “관리대상물질”과 목록화 방법이 다소 다르기 때문에, 산안법 보건조치 대상과 호환성이 떨어집니다. 오늘 다룬 이불화 암모늄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산업안전보건전문가의 책무
“안전한 사업장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위험한 사업장은 모두 제각각의 위험을 안고 있다. 한국의 산업안전보건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이 문장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바는 산업안전보건 전문가에게 주어진 윤리적 책무입니다.
먼저 한국의 산업안전보건이 현재 뒤죽박죽이라는 다소 절망적인 현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이어서 모두 제각각의 수많은 위험을 하나하나 찾아내서 분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전문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방과 보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통합해야 합니다.
이것이 산업안전보건 전문가들이 해야 할 일일 것입니다.
첫 문장을 완성해야 할 한국의 산업안전보건
이 일들은 수없이 많은 종류의 위험이 산업의 발전과 함께 계속 복잡해지고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정말 힘들고 지난한 작업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산안법은 화학물질 중독 사건이 다루어야 할 광범위한 것들을 놓치면서, 비의도적인 방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각각의 위험이 불행으로 이어지기 전에 발견되어 안전한 사업장의 모습을 갖춰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직업성 중독은 유기용제로 인한 독성 간염이나 비소 중독으로 인한 용혈성 빈혈 등 몇몇 질환으로 한정되고 있습니다,
특수건강진단은 유소견을 받은 근로자의 해고를 불러올 뿐이고, 작업환경측정은 기준치 미만이라는 면죄부만 주고 있습니다. 위험한 사업장의 모습이 모두 비슷해져서 산업안전보건 전문가의 윤리적 책무가 이행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1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비슷한 사고가 또 발생하더라도 산안법은 아직도 기능하지 못하고, 사업장에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책임은 물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10년 뒤에도 그럴지 모르고, 같은 사고가 반복되더라도 산안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불행이 이렇게 지나가버렸고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불행이 잊혀질지 두렵기까지 합니다. 아직 첫 문장조차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글쓴이: 김양우 (한양대 구리병원 직업환경의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