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직업환경의학회에서 제시하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의 역할
길게 설명되어있지만, 대한직업환경의학회가 정의하는 직업환경의학의 핵심 사명은 마지막 문장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직업적 혹은 환경적 “유해요인의 노출로 인한 건강장해의 예방”
이 사명을 위해 대부분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은 직업적 유해요인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정기적으로 평가합니다(특수건강진단).
그리고, 건강 표지자 (간효소수치, 혈중 지질, 혈압, 혈당, 단백뇨, 혈구수치, 청력, 생물학적 노출지표 등)가 적절한 범위를 벗어난 노동자들의 건강보호를 위한 조치(사후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유해요인을 보느라 사람을 제대로 못보는 건 아닐까?
하지만 지난 18년간 필자는 이런 활동을 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상태 악화에 직업적 유해요인 노출이 얼마나 기여할까?”,
“과연 특수건강진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건강상태가 유해요인 노출이 사라지면 향상될까?”,
“건강 표지자가 적정 수준을 벗어난 사람들을 찾아내 약물을 복용하게 하고, 간단한 건강관리 정보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과연 얼마나 건강상태가 개선될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의사로서 건강상태가 악화되는 노동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 뿐인가?”
더 나아가
“건강이란 무엇인가?”,
“약을 복용해서 건강 표지자들이 정상 상태에 머물면 건강해진 것인가?”
“과연 직업적 유해요인 노출 없는 노동이 가능한가?”
“혹시 특수건강진단에 매몰되어, 유해요인만 보고 일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못 보는 것은 아닌가?”.
미국직업환경의학회에서 제시하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의 역할
미국직업환경의학회(American College of Occupational and Environmental Medicine; ACOEM)에서는 직업환경의학 및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직업환경의학은 일 관련 손상과 질병의 진단 및 치료에 초점을 맞춘 예방의학 산하의 전문의학 분야다.
고도로 수련된 전문가로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는 임상 치료, 예방, 장애 관리, 연구, 교육 등의 활동으로 노동자의 건강을 향상시킨다.
그들은 일터(workplace)에서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거미줄 같이 복잡한 요인들을 선도적으로 다루는 전문가이며, 모든 유형의 조직들이 피고용인 건강, 일터의 생산성 및 전반적인 경제 발전을 보장하도록 돕는다.”
ACOEM의 직업환경의학에 대한 정의
한국과 미국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의 역할은 어떻게 다른가?
일 관련 손상과 질병을 언급하면서도, 대한직업환경의학회는 일터에서 노출될 수 있는 유해요인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 ACOEM은 최종적인 결과인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과 일터의 생산성,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한국과 미국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주로 수행하고 있는 업무나 고용상태와 관련 있는 듯합니다.
한국에서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기업에 고용되어 직접 피고용인의 건강과 생산성을 책임질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산업보건의 선임 의무가 기업활동규제완화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무력화된 이후, 그 기회는 좀처럼 마련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이 건강진단기관 혹은 보건관리전문기관에 고용되어 건강진단 업무 및 건강관리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많은 기업들이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에게 전문성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업이 아닌 의료기관에 근무하더라도 건강진단 및 작업환경 위해성 평가뿐만 아니라 업무적합성 평가, 업무관련성 평가, 장애평가 등의 업무를 실질적으로 요구받고 있는 듯합니다. 아래 미국 의료인 구인 웹페이지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에게 요구하는 업무 내용을 보면 미국의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미국 의료인 구인 구직 웹페이지
(Physician/Surgeon, Occupational/Environmental Medicine 선택하여 검색)
직업환경의학을 선택한 이유는?
제가 직업환경의학을 선택한 것은 ‘매향리 미군 사격장 피해주민 역학조사’가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의사가 진료실에서 환자만 진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갈등의 현장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리고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된 후 일터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건강 손상을 예방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지금과 같이 1년에 1~2번 건강진단을 하고, 검사 결과 이상 소견이 있는 사람들과 상담을 하고, 약물치료를 권하는 것만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건강상태가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을까?
노동환경이 열악할수록 근무조건이나 환경 개선이 어려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그 영향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업무상 유해요인 개선 이상의 개입이 필요하다
업무상 질병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뇌심혈관질환의 경우 교대근무, 장시간 노동, 업무상 스트레스를 비롯한 다양한 유해요인에 의해 악화될 수 있습니다.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는 뇌심혈관질환이 발생하기 전에 피재자가 어떤 업무상 유해요인에 노출되었고 그 영향을 미친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평가합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업무상 요해인자에 의해 뇌심혈관질환이 발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안타깝게 사망한 피재자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면. 그렇게 자주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약이라도 잘 복용해서 건강진단이나 외래 진료 시 검사 결과가 양호했다면.
더 나아가 열악한 조건에서도 혈압, 혈당, 혈중 지질 수치가 적절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건강한 식습관을 실천할 수 있었다면.
그 위험한 고비를 잘 넘길 수 있지 않았을까?
단지 유해요인에 의한 건강손상을 예방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직업환경의학 전문의가 수행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유해요인의 노출로 인한 건강장해의 예방”은 물론, 일터를 실질적으로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생활습관의학적 개입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