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라는 생소한 나라의 의료시스템 속에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떨어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조현아 | Pacific occupational medicine limited/Medical officer of special sca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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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거창한 꿈을 꾸고 뉴질랜드에 온 것은 아닙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왔다가 우연한 기회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여기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습니다. 지금의 고용주이자 수퍼바이저가 저를 본인의 첫 번째 직원으로 뽑았거든요.
뉴질랜드에서 직업의학은 공공의료 안에서 크게 활성화되어 있는 분야는 아닙니다. 대부분의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는 ACC에서 일하거나 private practice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병원에 소속되어 근무하는 것과는 업무 구조가 상당히 다릅니다. 외국에서 온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이곳에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뉴질랜드에서 의사로 일하려면 결국 뉴질랜드의 의료 시스템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라면 그중에서도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ACC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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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Accident Compensation Corporation)는 뉴질랜드의 공적 무과실 사고보상 제도(no-fault accident compensation scheme)를 운영하는 기관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고나 부상이 발생했을 때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기 전에 치료와 재활을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치료비, 재활 서비스, 직업복귀 지원, 일을 하지 못하는 동안의 주급 보상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중요한 점은 다친 장소가 직장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일하다 다쳤든, 운동하다 다쳤든, 집에서 다쳤든 기본적으로 사고로 인한 부상이라면 ACC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사람뿐 아니라 방문객도 뉴질랜드에서 사고를 당했다면 일정 범위에서 ACC의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뉴질랜드 여행을 왔다가 퀸스타운에서 골프를 치던 중 골프공에 머리를 맞아 뇌진탕이 생겼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ACC를 통해 뉴질랜드에서 필요한 치료를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근로복지공단과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릅니다.
ACC는 업무상 재해만 다루는 기관이 아니라, 뉴질랜드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개인 상해를 포괄하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민간 보험회사가 아니라 뉴질랜드 정부의 공공기관(Crown entity)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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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의료시스템은 영국과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공공(Public)과 민간(Private) 시스템이 나뉘어 있습니다.
영국 의료시스템의 장단점은 많이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뉴질랜드도 비슷합니다. 누구나 공공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문제는 언제 치료받을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기시간이 깁니다.
반면 민간보험(private insurance)가 있거나 비용을 직접 부담할 수 있다면 원하는 전문의(specialist)를 상대적으로 빠르게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비용은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전문의 진료(specialist consultation) 비용과는 조금 다른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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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는 무슨 일을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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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들은 바로는 뉴질랜드의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은 20%정도가 ACC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고, 나머지는 민간진료(private practice)를 합니다. 그런데 민간진료(private practice)라고 해서 반드시 환자가 직접 돈을 내고 의사를 찾아오는 구조는 아닙니다. 많은 경우 ACC가 민간 직업의사(private occupational physician)에게 평가를 의뢰하고 비용을 지급합니다.
물론 잠수의학(diving medicine)처럼 개인이 직접 비용을 지불하는 영역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직업환경의학과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상당히 다양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뉴질랜드에서는 ACC가 직업의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큽니다.
그렇다면 ACC 안에서 일하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와 ACC의 의뢰를 받아 밖에서 일하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는 무엇이 다를까요? ACC 내부의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는 주로 ACC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의료기록을 검토하고 의학적 자문을 제공하는 역할을 합니다.
환자를 직접 진료하기보다는 기존 진료기록, 전문의 의견, 검사 결과와 재활 경과를 검토합니다. 그리고 치료 필요성, 업무능력, 재활 방향, 인과관계 등에 대한 내부 clinical advice를 제공합니다.
반면 ACC의 의뢰를 받아 민간진료(private practice)에서 일하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는 환자를 직접 만나 평가하고 독립적인 의학적 의견을 제공합니다. 현재 상태는 어떤지, 어떤 기능이 제한되어 있는지, 실제 업무가 무엇인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제한이 필요한지, 추가 검사나 치료가 필요한지, 재활 방향이 적절한지를 평가해 ACC에 보고합니다.
ACC 안에서는 서류를 검토하고 의사결정을 돕는 조언자 역할을 하고, ACC 밖에서는 환자를 직접 만나 독립적으로 평가합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후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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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현재 민간진료(private practice)에서 ACC의 의뢰를 받아 일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의뢰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고나 부상으로 인해 일을 하지 못하거나 업무능력에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의 회복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현재 재활 방향이 맞는지, 추가 검사가 필요한지, 전문의 진료가 필요한지, 그리고 재활이 어느 정도 진행된 이후 어떤 업무를 할 수 있는지를 독립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런데 이 판단을 하기 위해 봐야 하는 자료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지금까지 받은 모든 치료기록과 재활기록은 기본입니다. 여기에 교육수준, 과거 병력, 과거 직업력, 현재 직업의 구체적인 업무 내용, 가족 및 사회적 상황, 때로는 사회경제적 배경까지 확인하게 됩니다.
이 자료를 읽고 정리하는 데 보통 한두 시간.
환자를 직접 인터뷰하고 평가하는 데 약 한 시간.
그리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또 한 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그래서 주 40시간을 기준으로 대략 12명 정도의 환자를 보는 것이 하나의 업무량이 될 수 있습니다.
주 12명을 보면…… 주중에 제가 운동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직 영어가 제 모국어가 아니고, 뉴질랜드의 시스템과 문화도 계속 배워가는 중입니다. 의학지식을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문제는 시스템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자 한 명의 보고서를 완성하고 나면 정말 머리가 뽀개질 때가 있습니다. 업무를 시작한 첫 한 달은 밤에 세 시간 자면 많이 잔 날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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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처음에는 궁금했습니다. 왜 환자 한 사람을 평가하는 데 이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그러다 어느 순간 한국에서 근로복지공단 상시자문의로 일하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어떤 사건에 대한 자문이 들어오면 공단 직원이 한 사람당 거의 책 한 권 분량의 자료를 들고 왔습니다. 의료기록, 근무기록, 작업 내용, 과거 직업력, 현장에 대한 설명까지 정말 많은 자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전부 읽지는 않았습니다. 담당 직원이 그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먼저 추려서 요약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요약본을 읽고,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물어봤습니다. 그러면 담당자가 원자료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줬습니다. 즉 한국에서는 제가 잘 정리된 요약본을 보고 판단했다면, 여기에서는 원자료부터 제가 직접 읽고 사건 전체를 재구성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의 자료는 100~200페이지 정도입니다. 가끔은 700페이지가 넘기도 합니다. 700페이지가 넘는 자료를 처음 받아들면 잠깐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일정 페이지 이상이면 추가 비용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곳에서는 환자 한 명을 평가하는 데 들어가는 의사의 시간을 상당 부분 비용으로 인정해 주는 구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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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하면서 문득 한국은 굉장히 분업이 잘 되어 있는 시스템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한국 방식은 빠릅니다. 많은 사례를 짧은 시간에 처리할 수 있습니다. 전문가에게 정말 필요한 정보만 정리해서 전달하면 전문가는 판단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분명 큰 장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하면, 사건을 처음 검토하고 정보를 정리하는 사람의 시각이 그 요약본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보고 무엇을 뺄 것인지 역시 하나의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뉴질랜드 방식은 느립니다. 그 대신 한 사건을 한 명의 전문가에게 상당 부분 온전히 맡깁니다. 전문가가 직접 원자료를 읽고, 환자를 만나고, 그 사람의 직업과 기능을 파악한 뒤 의견을 냅니다.
어느 방식이 무조건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두 나라가 전문가의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이 굉장히 다르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는 전문가의 판단을 상당히 신뢰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아마 전문가가 많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의사가 유니콘 같은 존재라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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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현재 IMA, VRR, S103, S105 등의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모두 환자의 상태, 회복, 재활, 업무능력 등을 평가하여 ACC에 제출하는 공식적인 의학적 보고서입니다. 한 사람당 보고서가 대략 20~30페이지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저는 아직 뉴질랜드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자격(specialist qualification)이 최종 인정되기 전이기 때문에, 현재는 지도 전문의(supervisor)의 감독(supervision) 아래에서 이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전문의 자격 인정 신청은 5월에 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뉴질랜드의 특징입니다. 한국에서 일주일이면 끝날 것 같은 일이 여기에서는 몇 달이 걸릴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속이 열불이 터집니다. 그런데 또 시간이 지나면 조금 적응하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몸이 아파도 직장에 나가야 하고, 열심히 해야 인정받는 분위기가 강했다면 이곳은 조금 다릅니다. 내가 일을 할 때는 그 느린 속도가 편합니다. 그런데 내가 서비스를 받아야 할 때는……
속이 터집니다.
사람은 참 간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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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 와서 직업환경의학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결국 의학지식만으로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의료제도와 사회보장제도, 직장문화, 환자와 의사의 관계, 그리고 사람들이 전문가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알아야 합니다. 저는 뉴질랜드에 온 지 아직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ACC 환자를 한 명 한 명 오래 들여다보다 보니, 어쩌다 보니 이곳에서 오래 산 사람들보다 ACC를, 아니 뉴질랜드를 더 많이, 깊게 알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 한 사람을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게 저는 오늘도 100페이지짜리 의료기록을 열고, 가끔 700페이지짜리 기록 앞에서 잠시 삶을 돌아본 뒤, 뉴질랜드에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 슬기롭게 살아남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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