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오이레터에서 지적한 산업보건 현장의 아날로그적 한계(PDF 및 수기 보고서 의존)에 동의하며, 논의를 다음 단계로 진전시키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현장의 디지털 전환(DX, Digital Transformation) 비용을 누가 부담할 것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수익 구조가 열악한 영세 전문기관에 시스템 도입 비용을 100% 전가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결국 정부가 디지털 솔루션과 소규모 기관의 수요를 연결하는 재정적 가교 역할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 실질적인 정책 대안으로 ‘산업보건 DX· AI 바우처’제도를 제안합니다.
산업보건 DX·AI 바우처 제안
정부는 산업재해보상보험 및 예방기금 등을 재원으로 삼아, 전국의 지정 산업보건전문기관이 부담 없이 선진 보건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할 수 있도록 바우처를 지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부가 바우처를 발행합니다. 소규모 산업보건전문기관은 그 바우처를 활용해 검증된 산업보건 소프트웨어와 AI 도구를 도입합니다. 산업보건 테크 기업은 바우처 결제나 구독 방식으로 비용을 회수합니다. 정부는 수요와 공급을 연결하고, 현장은 실제 도구를 도입하는 구조입니다.
지원 대상은 고용노동부가 지정한 소규모 보건전문기관이 될 수 있습니다. 보건관리전문기관, 특수건강진단기관, 작업환경측정기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지원 내용은 안전보건공단과 관련 부처의 최소한의 적격성 검증을 통과한 산업보건 특화 소프트웨어와 AI 도구의 연간 구독료 또는 도입비 일부를 바우처로 지원하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수요기관에 도입 비용을 지원하는 바우처 제도는 결코 낯설거나 실험적인 정책이 아닙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중소기업벤처부 등의 중앙부처는 영세 사업장의 디지털전환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수요-공급 매칭형 바우처를 활용합니다.
초기 자본이 부족한 중소기업의 경영 및 기술 혁신을 위해 컨설팅, 기술 지원 등을 제공하는 사업. 최근에는 ‘중대재해예방 바우처’ 트랙을 별도로 신설하여, 소규모 사업장이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하고 위험성 평가 컨설팅을 받는 데 필요한 비용을 선제적으로 지원하고 있음.
기술력이 부족한 수요기업이 검증된 테크 기업(공급기업)의 AI 솔루션이나 데이터 가공 서비스를 필요에 맞게 구매할 수 있도록 지원함. 영세 기관이 수 천만원에 달하는 전산망을 자체 구축할 필요 없이, 바우처를 통해 클라우드나 AI 솔루션을 도입할 수 있도록 진입 장벽을 낮춤.
지원 대상 프로그램도 분명합니다.
첫째, 수기 문서와 스캔 PDF를 데이터로 전환하는 산업보건 특화 엣지 AI OCR이 있습니다. 둘째, 노동자별 상담 기록이 타임라인 순으로 누적되고 연결되는스마트 보건관리 솔루션이 있습니다. 셋째, 화학물질의 CAS 번호와 직종 코드가 입력 단계에서 자동으로 연결되는입력 도구가 있습니다.
정책 도입에 따른 세 가지 기대효과
첫째, 전문기관의 행정 소모를 줄이고 실질적인 근로자 건강관리 능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소규모 산업보건전문기관도 비용 부담 없이 종이 없는 점검 및 축적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단순 행정 업무로 손실되던 전문 인력의 근로 시간을 고위험 사업장 및 근로자 관리에 집중되게 하여 이상 신호를 더 빨리 발견하고, 예방 중심의 산업보건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둘째, 산업보건 테크 기업의 시장을 만들고 산업보건 DX 생태계를 키울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소규모 기관이 수요는 있어도 비용 부담 때문에 도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우처가 생기면 이 불확실한 수요층이 시장으로 들어옵니다. 산업보건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는 정당한 매출을 확보할 수 있고, 이는 다시 안정적인 연구개발 투자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산업보건 테크 산업의 자생적 생태계를 만드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정부와 노동자에게 예방 목적의 보건 데이터를 남길 수 있습니다. 바우처를 통해 도입된 도구는 데이터의 규격과 코드를 통일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공정명 표준화와 유해인자 코드가 정밀하게 축적되면, 정부는 사후약방문식 대응을 넘어서 정밀한 데이터 기반 산재예방 정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노동자 개인이 자신의 앱이나 QR코드 등을 통해 이직 후에도 끊어지지 않는 건강 기록 체계를 가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기록 축적을 넘어 데이터 주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산재 예방 기금의 가장 현명한 투자
독일은 2020년 병원미래법(KHZG)을 제정하여 아날로그 행정에 머물던 의료기관이 디지털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도록 대규모 국가 예산을 직접 지원한 바 있습니다. 우리 산업보건 현장에도 그에 맞는 전환이 필요합니다. 매년 지출되는 사후 산재 보상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산업보건 DX 바우처에 투자한다면, 현장은 데이터 기반의 예방 중심 체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현장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은 개별 기관의 몫이 아닌, 국가 산업보건 체계의 고도화를 위한 공동의 과제입니다. 본 제안이, 실효성 있는 예산 지원과 제도적 안착 방안을 함께 기획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