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이고 과감한 안전보건 행정이 딱 필요한 시절
재단법인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 류현철
이런저런 기회로 현장의 안전관리자, 보건관리자나 담당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부분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등 최근 일터의 안전과 보건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변화가 그 분들에게 늘 달가운 일은 아닙니다. 안전보건 업무를 담당하는 분들이 기록하고 보고해야 할 업무가 늘어나고, 챙겨야 할 현장의 사안들도 늘어났지만 막상 업무에 요구되는 지위나 권한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 도입과 더불어 안전보건관리체계를 강조하면서 관련 직종의 일자리도 늘어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구되는 역량 수준에 비해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 계약직 일자리가 반갑지는 않습니다.
보건관리자의 능력은 고용 안정성으로 배가(倍加)된다
일터의 안전이 마치 공기처럼 원래 주어진 것이고 위험과 사고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안전보건 관리자들의 의욕을 꺾고 있습니다. 사실, 일터는 늘 위험합니다. 아무런 개입과 관리가 없이도 아름답고 조화로운 자연 환경과 달리 개입과 관리가 없는 작업 환경은 아름답기는 커녕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현장을 낱낱이 살펴야 하고, 상호 지켜야 할 지침과 프로토콜을 만들고 끊임없이 업데이트 해야 하며 안전·보건 장비와 시설을 갖추고 보완해야 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위험을 예견하고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끊임없이 살피고, 교육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일상의 활동들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야 위험이 관리되고 안전과 건강이 유지될 수 있습니다.
질병과 사고가 없으면, 오히려 노고를 인정받지 못하는 역설
일터나 회사에서 아무런 질병이나 사고가 발생하고 있지 않다면 그야말로 안전관리자, 보건관리자 및 담당자는 최선을 다하고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무재해의 평온한 현장이 유지되는 동안 그들의 존재감과 노고가 인정받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정작 사고나 재해가 발생하거나 감독관으로부터 과태료 처분을 받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가 되어서야 호출되어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추궁당하기 일쑤입니다.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원이 투여되어야 할지 가늠해보지 않고 안전을 디폴트 값이 되기를 기대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직장 내의 인식과 권능의 부재 속에서 결국 안전·보건 담당자들은 소진됩니다. 지속적인 활동과 개선을 통한 적극적인 안전·보건관리보다는 과태료 처분을 피하는 형식적 관리로 위축되게 됩니다.
안전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안전보건 공공행정 담당자들도 중요
이러한 안전·보건 담당자들의 소진은 안전보건 공공행정 담당자들에게도 거울상처럼 나타납니
다. 안전·보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요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소관 부처로서 역할과 소임을 위해 애쓰고 있는 많은 담당 공직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사회 전반에 있어서 안전이 당연한 상태이자 권리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타당한 주장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전이 모두에게 당연한 천부적 권리이기에 마치 별다른 인위적 노력 없이도 성취되는 것으로 여겨지다 보면 일상의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수고는 종종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 나라 안에서 벌어지게 온갖 사건과 사고들에 대한 관리의 책임 문제는 정부와 공무원들을 향하게 됩니다. 고충에 대한 이해와 공감도 필요합니다. 건설적 제도개선 논의 없는 일방적인 책임 추궁은 법조문의 형식적 해석과 적용에 집착하는 소극적 규제로 수렴되고 안전보건 행정의 위축은 결국 노동자들의 재해와 불건강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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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받은 권한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는 않은 고용노동부
하지만 법률적 권한을 위임받고 있는 조직과 공무원들이 일선 안전·보건관리자들과 똑같은 억울함만을 가지는 것도 경계할 일입니다. 법률의 취지는 차치하고 시행령을 통해서라도 행정적 권한을 확대하고자 하는 일부 행정부처에 비해, 법률에서 이미 위임한 권한조차 적극적으로 발휘하지 않는 듯한 고용노동부의 입장이 대비되어 보입니다. 산업안전보건 관련 법률에 대한 적극적 행정 해석을 통해서 법안의 취지를 달성하고자 하는 행보조차 보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산업안전분야 전문가들은 동종의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고용노동부나 그 위임을 받은 기관에서 수행한 재해조사관련 보고서를 모두에게 공개하고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살펴보면 이미 산업안전보건법 상 중대재해 원인조사에 대한 권한이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주어져 있고 원인조사의 ‘내용 및 절차, 그 밖에 필요한 사항’은 고용노동부령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용노동부는 결국 국회에 산안법 개정을 통해서 공개의 범위와 내용을 결정하도록 공을 넘겼습니다.
고열작업에 대한 적극적 해석과 주도력을 발휘하지 못해 아쉬워
올해 심각한 폭염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건강이 위협당하고 있다는 사회적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고용노동부의 행정적 적극성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고용노동부가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의 ‘고열 작업’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행정적 관할 범위 안으로 포괄할 수 있기를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머뭇거리는 사이에, 국회에서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폭염기 작업중지권을 주자는 입법안이 올라오게 됩니다. 제안된 법률의 효과성이나 작동성 여부를 떠나서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본부의 책임 행정이나 자존감은 보이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기업규제완화에서만 발휘되는 행정적 결단성
고용노동부도 과감한 행정적 결단력을 보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2018년부터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최대 주 52시간 근무가 법제화되고 사업장 규모별 단계적 시행방안까지 법에서 정한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9년 고용노동부 장관이 중소기업의 입장을 고려하여 법적 근거가 불분명한 ‘계도기간’을 연장하여 법률위반에 대해 단속하지 않겠다고 직무유기에 가까운 선언을 합니다. 한편 고용노동부장관의 권한으로 52시간 상한에 대한 예외로서 ‘특별연장근로’ 인가하였고, ‘통상적이지 않은 업무량의 대폭 증가’를 포함하는 등 인가 범위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는 조치도 합니다. 과로사를 조장하는 장시간 노동에 대한 사회적 우려에 대한 대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용노동부의 행정적 결단과 과단성은 주로 기업의 입장과 규제 완화의 측면에서만 작동하거나 혹은 멈춘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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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보건의 최저선을 지키는 역할에서 능동적인 행위자로 정부의 역할 변화
산업안전보건은 기업의 입장에서도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분야입니다. 만약 질병과 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생산활동에 차질이 생기면 기업의 이윤뿐만 아니라 신뢰도 저하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개별 기업의 편법적인 활동에 의해 전체 기업의 이익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안전보건의 최저선을 세우는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시민들이 요구하는 안전과 건강에 대한 기대는 높아졌습니다. 산업구조와 기술이 고도화되고, 플랫폼 노동과 같은 새로운 경제활동이 확대되면서 기존의 체계에 변화를 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시민들과 노동자들은 정부가 산업안전보건에서 능동적인 행위자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고용노동부 산업안전보건본부가 내놓는 로드맵과 정책방향에서 안전보건관리체계, 자기 규율, 위험성평가가 주요하게 언급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답하기 위한 고민의 발로로 보입니다.
변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새로운 방향은 과거에 대한 평가와 성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기존의 산업보건 제도들이 왜 실재하는 위험을 드러내고 개선과 관리로 연계시키지 못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10년 동안 위험성 평가가 자리 잡지 못한 이유가 단지 평가방법이 어렵기 때문이었을까요? 위험이 드러나면, 과태료와 행정적 제제만이 뒤따거나, 효과가 불분명한 해법만 제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과거에는 산업안전보건 관련 근로감독관 집무규정에는 법 위반 사항에 대해서 1차 시정조치 후 미이행시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하는 융통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독 관행이 기업과 사업주에 대한 ‘봐주기’로 흘러가면서, 언론과 노동계, 심지어 감사원까지 문제를 지적했고, 결국 즉시 과태료 부과 방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산업안전보건 감독이 처벌에만 목적을 두는 획일적 적용에 불과해서 효과가 없다 비판합니다. 반면 노동계에서는 사업주의 눈치를 보고, 적극적인 행정을 구사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난맥상이 변화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겨레] 노동부 ‘봐주기’ 남발…공사장 안전 무너진다 (2010년 기사)
[뉴스와이어]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즉시 과태료 부과 (2010년 기사)
산업안전보건 감독관의 실무역량과 신뢰성
소위, 지시적 규제에서 목표기반 규제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안전보건 감독 행정은 전문성과 신뢰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기업이 선택할 수 있고, 구체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조언과 지도, 개선 조치, 작업 중지 명령, 기소와 처벌까지 감독관이 구사할 수 있는 행정적 조치의 융통성도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획일적인 감독 관행에 과감한 변화가 필요합니다. 노동계에는 기업과의 짬짜미 의심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하는 복무규정 관리 방안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산업안전보건 감독관에 대해서 노사 양측이 권위를 인정하는 해외의 사례들을 보면 결국 산업안전보건 감독관의 실무 역량에 대한 신뢰가 근저에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법을 개정하고 시행령, 시행규칙을 바꾸어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감독관의 역량과 권한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한국일보] 기업 10곳 중 6곳 "산업안전보건 감독 효과 없다"
[시사저널] 영국 현지 취재 - 축구장 300개 넓이, 세계 산업 안전은 우리가 지킨다 .
[산업보건학회지] 산업안전보건청의 설립 필요성과 추진방안에 관한 연구 (정진우, 2017)
안전보건행정의 정책결정권자의 과감한 시도를 기대합니다.
기업의 안전보건 관리에 있어서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의 역할이 핵심적인 것처럼, 안전보건 행정에 있어서도 정책결정권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법과 제도에 근거해서 든든히 뒤를 지켜주는 조직에 대한 믿음이 일선의 감독관과 행정 담당자들이 적극적인 역할을 자임하게 만들 것입니다. 고단하고 힘든 과정이겠지만 고용노동부는 안전보건 행정 주무부처로서 끊임없이 조정하고 개입하고 경청해야 합니다. 산업재해 및 안전보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양되어 노사관계를 초월한 당위성을 얻고 있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통해 다양한 부문에서 논의가 촉발되고 확장되었고 제도적 변화에 대한 수용 가능성도 높아져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안전보건 제도에 변모를 제대로 도모해볼 만한 시절이 아닌가 합니다.
글쓴이: 류현철 (재단법인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