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상질병 ‘기준’ 위원회로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업무상질병‘기준’위원회로 변화를 모색해야 할 듯 합니다. 새로운 위원회는 다음의 전제를 충족시킬 수 있는 구조이어야 합니다.
1) 업무상질병의 판정은 신속한 판단이 가능해야 합니다.
신속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제안되고 있는 추정의 원칙 확대 적용은 산재 여부에 대한 판단은 통상’의 행정 절차로 수행됨을 전제로 가능할 것입니다. 개별 사례들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진단과 노출평가의 적절성, 산재로 인정해야 할 노동자의 사정, 사회적 편익 등을 따지는 현재의 질판위 체계가 물리적으로 승인기간을 줄여주기는 어렵습니다.
2) 근거에 기반해 업무상 질병 인정기준을 정립·보완하는 위원회가 필요합니다.
행정적 판단 절차 수행과 별개로 충분한 사전 연구를 통해서 다양한 의학적, 역학적 자료와 해외 사례를 검토, 한국적 상황에 대한 고려를 통해 업무관련성 추정의 기준을 제시하고 산재 신청과 승인 통계를 기반으로 이를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이 과정에서 산재의 승인 기준(추정의 원칙)은 사회적 ‘합의’기준이라는 관점을 유지해야 합니다. 의학적이고 역학적인 근거들은 주어진 재원과 사회의 수용성을 고려하여 산재 승인을 통해 얻어질 사회적 이득이 높은 대상 질병군 및 노동자군(정책적 우선 순위) 선정을 위한 참고자료로 기능해야 합니다.
3) 담당자들이 행정적 판단을 잘 내릴 수 있도록 기준을 마련하고 교육해야 합니다.
잘 훈련된 담당자라면 판단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추정의 원칙 틀(종사직업 또는 직무, 근무 기간, 유효기간 3요소를 제시)을 만들고, 이 기준을 충실하게 적용하도록 행정적 절차를 마련해야 합니다. 또한 ‘기준’위원회는 일선의 행정 담당자들을 교육하고 전문성을 높이는 업무를 담당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행정적 절차를 단시간 내에 처리해주어야 노동자들도 재심의나 행정구제, 재판 등 높은 심급의 판단을 받을 수 있는 시간적 여건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준의 경계선에 있어 행정적 판단이 어려운 사례들에 위원회의 판단을 구하도록 합니다.
4) 산재여부 판정에 매몰되어 온 사회적 비용을 산재 예방으로 연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학적으로 확정되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도 보건관리 수준향상과 산재 예방이라는 사회적 효과를 제고할 수 있다면 폭넓게 승인하는 추정 원칙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반도체 산업의 직업병 사례에서 보듯 갈등으로 인해 소모되는 사회적 자원과 비용을 줄여 예방을 위한 활동에 투입되도록 하고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기준 적용을 통해 얻어지는 예방의 효과를 산재 신청 증감을 모니터링하여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학조사가 개별 사안의 산재 승인 여부를 다투는데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예방을 위한 개입의 지점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무책임한 과잉진료 혹은 무차별적인 검사로 증상 없는 상병을 만들고 불신과 그에 따른 비용을 초래하는 사안들에 대해서도 판단과 조치를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제도, 이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가능합니다.
완벽한 제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도의 한계로 비롯되는 문제를 제기하고 제도의 완성도를 높일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행동과 활동 또한 당연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제도를 운영하는 근로복지공단, 정책적 설계를 담당하는 고용노동부, 이해 당사자들이 이제 테이블에 앉을 시간입니다. 산재보험기금은 수십조에 이릅니다. 정책 의지, 실질적 개입과 개선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지금껏 질판위로 할 만큼 했습니다. 새로운 구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지체될수록 힘겨워지는 것은 바로 산재보험과 노동조합이 지키고자 했던 노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업무상질병판정위로는 할 만큼 했다. 매일노동뉴스 2021년 5월 27일자
*본 기고는 2021년 5월 27일에 매일노동뉴스에 기고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수정·보완된 글입니다
글쓴이: 류현철(재단법인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